신의 은총과 공동선- 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5년 01월 24일(금) 00:00 가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기대감을 지니고 있으며, 기대감의 성취 여부에 따라 감정의 기복이 달라지기도 한다. 만일 사람에게 기대한 것이 이루어졌다면 기뻐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겠지만,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을 때는 실망하고 싫어하고 미워하고 급기야 증오하기도 한다. 만일 어떤 물건에 기대하여 그 기대가 채워졌다면 물건을 소중하게 여길 것이고,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헌신짝처럼 던지거나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다. 예상되는 것을 바라고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기대감(期待感)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삶을 나아가지 못하게 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왜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는가?”, “왜 우리는 어떤 것과 무엇에 기대하여 희망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그리고 혹시 사람이나 어떤 것에 기대하는 것이 ‘내 존재의 소중함을 망각하고 있거나 내 삶의 행복 기준을 사람이나 어떤 물건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행복과 기쁨은 어떤 기대감에서 올 수 있지만, 무엇보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함을 잊지 않을 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살아 있으니 모든 것이 고마움인 것처럼.
종교라는 단어는 가장 뛰어난, 근본을 가르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그 종교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것이며 상식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상태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교는 소외시키지 않고 배제하지도 않으며 공동선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이 통합, 곧 일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근본을 가르치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놓는 종교라면 누구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종교를 가지며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옆에서 동행하고 있는 사실을 보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희망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는 봉사활동과 희생은 좌절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다시 회복시켜주기도 하고, 생명을 포기하려는 이에게는 다시 살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한다. 가톨릭교회는 이렇게 신앙의 힘으로 활동하는 나눔과 봉사와 희생을 거룩하게 여긴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지만 하느님의 일을 신앙인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종교의 이름을 걸고 어떤 특정 집단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어떤 철학자는 이런 행태의 종교 지도자들 가리켜 ‘종교 사업가’라고 칭하기도 한다. 장사꾼이고 그 종교를 믿는 신앙인들을 이용할 뿐이며 신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사기꾼에 불과하다. 결국 이들은 자신을 신으로 칭하여 모두를 위하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통용되지도 않으며, 인간 상식을 벗어나서 신을 돈으로 거래하는 하나의 ‘종교 사업가’가 아닐까? 사회학자들은 종교를 사회의 통합을 이루어내는 소중한 내적 동력이라 하며, 철학자들은 종교를 사람들에게 희망을 되찾게 도와주고 행복과 기쁨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삶의 진리라고 표현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의 은총은 공동선을 향한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공동체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 12장 4절에서 11절에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은총은 병을 치유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예언하고, 영들을 식별하거나 신령한 언어를 말하고 해석하는 등 다양하다. 그러나 이 모든 은총은 하나의 원천, 성령께서 일으키신다. 곧 은총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받은 은총이 특별하여 다른 은총을 받은 이들을 업신여기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공동체를 망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는 공동선과 멀어지고 분열을 일으킬 뿐이다. 공동선에 멀어지고 분열을 일으키는 ‘종교 사업가’! 그래서 폭력을 조장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가끔 종교의 이름을 걸고 어떤 특정 집단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어떤 철학자는 이런 행태의 종교 지도자들 가리켜 ‘종교 사업가’라고 칭하기도 한다. 장사꾼이고 그 종교를 믿는 신앙인들을 이용할 뿐이며 신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사기꾼에 불과하다. 결국 이들은 자신을 신으로 칭하여 모두를 위하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통용되지도 않으며, 인간 상식을 벗어나서 신을 돈으로 거래하는 하나의 ‘종교 사업가’가 아닐까? 사회학자들은 종교를 사회의 통합을 이루어내는 소중한 내적 동력이라 하며, 철학자들은 종교를 사람들에게 희망을 되찾게 도와주고 행복과 기쁨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삶의 진리라고 표현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의 은총은 공동선을 향한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공동체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 12장 4절에서 11절에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은총은 병을 치유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예언하고, 영들을 식별하거나 신령한 언어를 말하고 해석하는 등 다양하다. 그러나 이 모든 은총은 하나의 원천, 성령께서 일으키신다. 곧 은총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받은 은총이 특별하여 다른 은총을 받은 이들을 업신여기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공동체를 망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는 공동선과 멀어지고 분열을 일으킬 뿐이다. 공동선에 멀어지고 분열을 일으키는 ‘종교 사업가’! 그래서 폭력을 조장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