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예향] Wando Atelier
2025년 07월 09일(수) 10:50 가가
자연을 벗 삼은 시인의 아틀리에, 부용동의 여름
연못에는 어린 연잎이 자라고, 정자에는 시간이 머문다. 초여름, 완도 보길도의 깊은 골짜기에서 조선의 시인 고산 윤선도가 남긴 풍경과 마주한다.
“봉래로 착각하고 들어와 홀로 진경 찾으니 / 물물이 맑고 기이하며 하나하나 신비로워 / 가파른 절벽은 천고의 뜻을 말없이 간직하고 / 아늑한 수풀은 사시의 봄빛을 한가히 띠었어라 / 어찌 알랴 오늘 산중의 이 나그네가 / 뒷날 그림의 소재가 되지 않을 줄을 / 진세의 재잘거림이야 말할 것이 있으랴 / 돌아갈 생각하니 신선들 책할까 두렵도다” (고산유고 『황원잡영』 중에서)
세상과 떨어져 지내고 싶어 정착한 이곳에서 세속의 번잡 속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충만한 한가로움을 선물받은 듯 하다. 오늘날 후세들은 이곳을 부용동 ‘정원’으로 부르고 있지만 고산 선생에게는 이곳이야말로 시를 짓고 삶은 빚은 장작의 공간, ‘자연 속 아틀리에’였다.
차를 타고 두시간, 배를 타고 30분, 노화도에서 다시 차를 몰아 찾아간 부용동 정원. 조선 중기 문인이자 학자, 시인이었던 고산 윤선도가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 속에서 은거 생활을 했던 곳이다. 고산이 직접 조성한 생활공간이자 놀이공간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별서정원에 해당한다.
해발 431m 적자봉을 중심으로 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는 계곡 주변에 부용동 원림문화가 형성됐다. ‘부용(芙蓉)’은 보길도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해서 직접 지은 이름이다.
정식 명칭은 ‘보길도 윤선도 원림’. 예전에 비해 당연히 교통은 좋아졌지만 여전히 가는 길은 쉽지 않다. 고산은 이곳 보길도에서 조선 중기 대표적인 가사 문학 작품 중 하나인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와 『황원잡영』 등 주옥같은 한시를 탄생시켰다.
윤선도와 보길도의 인연은 언제부터였을까.
1637년 2월,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윤선도는 육지에서 살아가는 것도 부끄럽다 하여 세상에 등을 돌리고 제주를 향해 떠난다. 배를 타고 항해 도중 보길도의 수려한 봉우리를 멀리서 보고 그대로 배에서 내렸다. 섬 중앙의 주봉인 격자봉(적자봉)에 올라 감탄한 그는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 말했다고 전해진다.
윤선도는 섬의 주봉인 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조그마한 세 채의 집을 동쪽과 서쪽, 중앙에 짓고 기거했다. 그리고 85세 삶을 마치기까지 보길도 곳곳에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정성암 등 25채의 건물과 정자를 짓고 자신만의 낙원인 부용동 정원을 가꿨다. 각각의 정자와 바위, 수목, 물길은 고산 윤선도의 철학과 예술관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현재 복원된 부용동 원림(명승 제34호)은 고산의 5대 손인 윤위(1725~1756)가 24세때 보길도를 답사한 후 보길도의 위치, 고산 유적지의 배치, 고산의 사람됨과 생활상 등을 소상하게 기록한 『보길도지』를 토대로 했다.
정원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세연정과 낙서재, 동천석실 일원이다.
세연정(세연지)는 부용동 원림의 중심에 위치한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들어와 가장 처음 지은 건축물로 알려져 있으며 가장 공들여 꾸민 공간이기도 하다. 초여름 길목, 개울처럼 이어진 연못 안에는 아기 손바닥 크기의 어린 새싹 연잎이 하루하루 잎맥을 키워가고 있다. 녹음이 드리워진 그늘 아래 서면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절로 눈이 감긴다.
연못은 개울에 보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판석보를 막아 조성됐다. ‘굴뚝다리’라고도 부르며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판석보 덕에 물과 바위, 송죽과 정자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 탄생했다.
세연지 중앙에 앉힌 세연정은 일반 누각과는 달리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사방으로 창호와 마루를 둘렀다. 창호는 분합문(分閤門)으로 문을 모두 들어 걸면 사방이 개방된 정자가 되어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산은 이곳에서 예악(禮樂)으로 성정을 다스리며 자연과의 합일에 이르고자 했다.
한편의 시보다 시적인 이 공간에서 윤선도는 글을 쓰고 사유를 다듬었다. 사계절의 자연을 어부의 삶으로 빚어낸 시조 『어부사시사』 40수를 완성했고 『황원잡영』과 같은 한시도 남겼다.
세연정 주변에는 일곱 개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를 지칭하여 ‘칠암(七岩)’이라 불렀다. ‘활을 쏘는데 발 받침 역할을 했다’고 전해지는 사투암, 힘차게 뛰어갈 듯한 황소의 모습을 닮은 혹약암 등이 있다.
세연정을 나와 1km 정도 숲길을 오르면 낙서재가 나온다. 윤선도가 실제 거주했던 집이자 생애 마지막까지 머문 공간이다. 윤위의 『보길도지』에 따르면 처음 이곳에 집을 지을 때는 수목이 울창해서 산맥이 보이지 않아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달고 격자봉을 오르내리게 하면서 높낮이와 향배를 헤아려 집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이렇게 잡은 낙서재 입지는 보길도 안에서도 가장 좋은 양택지라고 한다. 처음에는 모옥(띠나 이엉 따위로 지붕을 만든 집)으로 지어 살다가 그 뒤에 잡목을 베어 거실을 만들었는데 후손들에 의해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중앙 기와집 아래에 거북형상의 바위가 놓여 있다. ‘귀암’이라 부르는 이 바위는 낙서재 터를 고르는데 중요한 지표이기도 했다. 화강암을 쪼아 거북형상을 만들고 윤선도가 달맞이하던 장소로 기록돼 있다.
오늘날 복원된 낙서재는 여행객이 오르내리게 편하게 길이 놓아졌고 사방이 뻥 뚫려 주위 풍경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잘 관리돼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동천석실은 보길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정자로 산중턱에 자리한다. 동천석실 입구에 차를 두고 20여 분 산을 올라야 한다. 동천(洞天)은 하늘로 통하는 곳, 신선이 사는 곳이다. 석실은 책을 보존해 둔 곳, 산중에 은거하는 곳이니 고산에게 동천석실은 서책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처소였다. 격자봉과 마주하며 온 골짜기가 눈 아래 펼쳐지고 낙서재가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고산은 현실의 좌절과 갈등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자 했다.
/글=이보람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봉래로 착각하고 들어와 홀로 진경 찾으니 / 물물이 맑고 기이하며 하나하나 신비로워 / 가파른 절벽은 천고의 뜻을 말없이 간직하고 / 아늑한 수풀은 사시의 봄빛을 한가히 띠었어라 / 어찌 알랴 오늘 산중의 이 나그네가 / 뒷날 그림의 소재가 되지 않을 줄을 / 진세의 재잘거림이야 말할 것이 있으랴 / 돌아갈 생각하니 신선들 책할까 두렵도다” (고산유고 『황원잡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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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보길도 윤선도 원림내 세연정. 창호를 모두 들어 걸면 개방된 정자가 된다. /최현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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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에 보를 막아 조성한 보길도 세연지. 보길도의 산세와 닮은 연꽃이 피어 있다. /최현배 기자 |
윤선도와 보길도의 인연은 언제부터였을까.
1637년 2월,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윤선도는 육지에서 살아가는 것도 부끄럽다 하여 세상에 등을 돌리고 제주를 향해 떠난다. 배를 타고 항해 도중 보길도의 수려한 봉우리를 멀리서 보고 그대로 배에서 내렸다. 섬 중앙의 주봉인 격자봉(적자봉)에 올라 감탄한 그는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 말했다고 전해진다.
윤선도는 섬의 주봉인 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조그마한 세 채의 집을 동쪽과 서쪽, 중앙에 짓고 기거했다. 그리고 85세 삶을 마치기까지 보길도 곳곳에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정성암 등 25채의 건물과 정자를 짓고 자신만의 낙원인 부용동 정원을 가꿨다. 각각의 정자와 바위, 수목, 물길은 고산 윤선도의 철학과 예술관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현재 복원된 부용동 원림(명승 제34호)은 고산의 5대 손인 윤위(1725~1756)가 24세때 보길도를 답사한 후 보길도의 위치, 고산 유적지의 배치, 고산의 사람됨과 생활상 등을 소상하게 기록한 『보길도지』를 토대로 했다.
정원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세연정과 낙서재, 동천석실 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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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정 입구에 자리한 윤선도 전시관. /최현배 기자 |
연못은 개울에 보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판석보를 막아 조성됐다. ‘굴뚝다리’라고도 부르며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판석보 덕에 물과 바위, 송죽과 정자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 탄생했다.
세연지 중앙에 앉힌 세연정은 일반 누각과는 달리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사방으로 창호와 마루를 둘렀다. 창호는 분합문(分閤門)으로 문을 모두 들어 걸면 사방이 개방된 정자가 되어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산은 이곳에서 예악(禮樂)으로 성정을 다스리며 자연과의 합일에 이르고자 했다.
한편의 시보다 시적인 이 공간에서 윤선도는 글을 쓰고 사유를 다듬었다. 사계절의 자연을 어부의 삶으로 빚어낸 시조 『어부사시사』 40수를 완성했고 『황원잡영』과 같은 한시도 남겼다.
세연정 주변에는 일곱 개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를 지칭하여 ‘칠암(七岩)’이라 불렀다. ‘활을 쏘는데 발 받침 역할을 했다’고 전해지는 사투암, 힘차게 뛰어갈 듯한 황소의 모습을 닮은 혹약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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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동천석실. 윤선도가 서책을 즐기며 신선처럼 지내던 처소였다. /최현배 기자 |
이렇게 잡은 낙서재 입지는 보길도 안에서도 가장 좋은 양택지라고 한다. 처음에는 모옥(띠나 이엉 따위로 지붕을 만든 집)으로 지어 살다가 그 뒤에 잡목을 베어 거실을 만들었는데 후손들에 의해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중앙 기와집 아래에 거북형상의 바위가 놓여 있다. ‘귀암’이라 부르는 이 바위는 낙서재 터를 고르는데 중요한 지표이기도 했다. 화강암을 쪼아 거북형상을 만들고 윤선도가 달맞이하던 장소로 기록돼 있다.
오늘날 복원된 낙서재는 여행객이 오르내리게 편하게 길이 놓아졌고 사방이 뻥 뚫려 주위 풍경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잘 관리돼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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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 아들 학관이 살았던 곡수당. 하루 세 번 아버지께 문안을 드리러 건넌 다리인 일삼교가 놓여 있다. /최현배 기자 |
/글=이보람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