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는 결코 진짜가 될 수 없다 -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4년 12월 30일(월) 00:00 가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진짜와 가짜가 너무나 닮아 보이는 위장 기술의 현실도 문제지만, 정말 진짜는 진짜라고 요란하게 소리 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짜가 진짜 노릇을 하거나 가짜가 더 큰 환호를 받는 것은 사실 모두의 책임이다. 진짜와 가짜의 문제는 소위 명품 가방이나 신발 등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우습게도 유명하지 않거나, 저렴한 물건에는 짝퉁조차도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진짜를 흉내 내는 화려한 가짜들이 많다. 게다가 사람에게서 진짜와 가짜 구별은 더더욱 어렵다. 진짜의 의미는 이미 세상에 있는 것을 본뜨지 않으며, 본질과 형식에 거짓과 왜곡이 없음을 말한다. 반면에 가짜는 진짜처럼 꾸미고 거짓을 참이라고 주장하면서 믿을 것을 강요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만큼 ‘가짜 되기’의 욕망에 휘둘리며, 현실만큼 쉽게 가짜가 진짜로 통하는 일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진짜와 가짜의 관계는 매우 상호조건적이어서 단순하지 않다. 이 둘은 가장 멀고도 가장 가까운 관계다. 진짜가 있어야 가짜가 있고, 가짜 덕분에 진짜는 더 큰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이 조건을 이용하는 가짜 종류 중에서 사람의 가짜 모습이 가장 그럴듯한 진짜 모습을 한다. 하지만 가짜가 진짜를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있다. 진짜에게만 있는 진정성이다. 이 진정성만은 유일하게 가짜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화 속 까마귀처럼 가짜 모습을 하면서 아둔하고 염치없고 비루해지기 쉽다. 이솝 우화를 보면 어느 날 제우스 신이 가장 깃털이 아름다운 새를 왕으로 뽑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새들은 시냇가로 가서 정성스럽게 깃털 단장을 한다. 그중 깃털은 형편없지만 꼭 왕이 되고 싶은 갈까마귀는 시냇물에 떠내려오는 다른 새들의 깃털 중 아름다운 것만을 골라서 화려하게 자기 몸에 붙여서 소원대로 왕이 되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새들은 분노해서 갈까마귀 몸에서 자신들의 깃털을 떼어냈다. 그리고 갈까마귀는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까마귀가 왕이 되려는, 즉 욕망하는 진짜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다만 문제는 가짜 깃털로 붙이고 왕이 되려고 한 것이다. 본 모습을 숨기고 자신을 위장하고 왜곡해서 가짜를 내세워 얻은 결과는 그것이 무엇이든 당연히 가짜다. 어떤 사람을 진짜라고 함은 실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신의 개성, 정신과 능력의 실체를 드러내는 자세다. 이것은 흉내 내거나 모방 될 수 없는 능력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짜는 진짜가 결코 되지 못하고, 가짜는 진짜가 되고 싶은 욕망이자 거짓 그 자체의 모습이다. 그리고 욕망이 빚어낸 거짓의 무게가 곧 추락의 이유다. ‘거짓은 꼬챙이처럼 뚫고서 나온다’고 하지 않는가.
반면에 자연은 사람과 달리 가짜가 진짜 행세하려는 욕망과 아둔함 없이 그 자체로 당당함을 보인다. 진짜는 참으로 불리고, 가짜는 ‘개’로 표현될 뿐이다. 자연에서는 가짜가 진짜인 양하지 않으며, 서로가 어울리며 의지하는 생명 관계의 본질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참기름, 참꽃, 참다래 등이 있고 개머루, 개살구, 개다래 등이 있다. 이들은 진짜와 가짜가 함께 격의 없이 그냥 어울려서 살아간다. 사람들처럼 가짜가 진짜를 모방하거나 거짓으로 속이는 일도 없고 진짜라는 진정성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이 자연을 배우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사람은 지독한 자기애와 자기연민의 동굴에 갇혀서 사는 탓인가.
자기애와 연민이라면 신화의 나르키소스를 넘을 자가 없다. 그는 타인과의 모든 관계를 거부하고 오직 자신만을 사랑했다. 자신을 너무나 사랑해서 물속에 비친 자신 모습을 소유하려다가 결국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목숨 걸고 욕망한 것은 자신의 그림자였을 뿐이다. 이 그림자는 허망한 욕망, 왜곡된 아집과 망상이다. 이 나르키소스의 이야기가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가 싶어 두렵다.
가짜는 자신이 가짜인 줄을 모르기에 결코 진짜가 될 수 없는 바보다. 새해에는 더는 바보로 살지 않기 위해 시 한 구절을 깊게 새긴다.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까마귀가 왕이 되려는, 즉 욕망하는 진짜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다만 문제는 가짜 깃털로 붙이고 왕이 되려고 한 것이다. 본 모습을 숨기고 자신을 위장하고 왜곡해서 가짜를 내세워 얻은 결과는 그것이 무엇이든 당연히 가짜다. 어떤 사람을 진짜라고 함은 실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신의 개성, 정신과 능력의 실체를 드러내는 자세다. 이것은 흉내 내거나 모방 될 수 없는 능력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짜는 진짜가 결코 되지 못하고, 가짜는 진짜가 되고 싶은 욕망이자 거짓 그 자체의 모습이다. 그리고 욕망이 빚어낸 거짓의 무게가 곧 추락의 이유다. ‘거짓은 꼬챙이처럼 뚫고서 나온다’고 하지 않는가.
반면에 자연은 사람과 달리 가짜가 진짜 행세하려는 욕망과 아둔함 없이 그 자체로 당당함을 보인다. 진짜는 참으로 불리고, 가짜는 ‘개’로 표현될 뿐이다. 자연에서는 가짜가 진짜인 양하지 않으며, 서로가 어울리며 의지하는 생명 관계의 본질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참기름, 참꽃, 참다래 등이 있고 개머루, 개살구, 개다래 등이 있다. 이들은 진짜와 가짜가 함께 격의 없이 그냥 어울려서 살아간다. 사람들처럼 가짜가 진짜를 모방하거나 거짓으로 속이는 일도 없고 진짜라는 진정성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이 자연을 배우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사람은 지독한 자기애와 자기연민의 동굴에 갇혀서 사는 탓인가.
자기애와 연민이라면 신화의 나르키소스를 넘을 자가 없다. 그는 타인과의 모든 관계를 거부하고 오직 자신만을 사랑했다. 자신을 너무나 사랑해서 물속에 비친 자신 모습을 소유하려다가 결국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목숨 걸고 욕망한 것은 자신의 그림자였을 뿐이다. 이 그림자는 허망한 욕망, 왜곡된 아집과 망상이다. 이 나르키소스의 이야기가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가 싶어 두렵다.
가짜는 자신이 가짜인 줄을 모르기에 결코 진짜가 될 수 없는 바보다. 새해에는 더는 바보로 살지 않기 위해 시 한 구절을 깊게 새긴다.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