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그 뜨거운 말 -천현우 산문 ‘쇳밥일지’
2022년 09월 08일(목) 00:15
지난달 칼럼에서 서남 전라도 서사시라는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시집 ‘그라시재라’(이소노미아)를 소개했었다. 좀처럼 문학과 시 전면에 등장하지 못했던 지역의 언어를 통해 집단의 역사와 개인의 삶을 노래한 시집이다. 규격화된 말 바깥의 말로 구성된 시집이기에 그 말을 쓰지 않는 독자들에게 가닿을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이었지만, 다행히도 눈과 귀가 밝은 이들에게 통한 모양이다. 최근 2022년 ‘노작문학상’에 조정 시인이 시집 ‘그라시재라’로서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변방의 언어로 사라질 수 있었던 음성과 의미를 그러모아 시로 쓴 시인의 애씀이, 그 노고와 시간이 대체로 인정받은 것 같아 다행스러운 마음이다.

그사이에 또 다른 언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라시재라’에서 만난 나의 할머니, 아니 그 할머니의 할머니부터 내려왔음 직한, 그래서인지 생래적으로 그리고 감각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었던 언어와는 달랐다. 천현우 산문집 ‘쇳밥일지’(문학동네)에서 만난 언어는 분명 현시대의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낯선 감각으로 다가왔다. ‘청년공, 펜을 들다’라는 부제처럼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청년이 펜을 들게 되는 과정,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산문집이다.

저자 천현우는 주간지에 글을 쓰면서 필자로서 주목을 받게 되는데, 주간지에서 보았던 그의 생생한 글과 현장에 밀착한 언어를 한 권의 책으로 볼 수 있어 기뻤다. 또한 그가 쓴 현실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도리어 악화일로를 걷고 있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어 슬펐다. 이렇게 이 책은 읽는 이의 속마음을 뜨겁게 달궜다가 차갑게 식히며 단련시킨다. 스스로를 단련시킨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책과 이 책의 저자가 그러하다. 저자의 동료들도 그러할 것은 물론이다.

‘그라시재라’가 시로서 한국전쟁 전후와 1960년대 서남 전라도 여성들의 일상 언어를 기록하고 복원했다면 ‘쇳밥일지’는 2020년대 경상남도 공업지대(마산, 창원) 남성들의 현장 언어를 기록하고 각인했다. 전자의 시집에서 희극과 비극이 있듯이 ‘쇳밥일지’도 읽으면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고, 마찬가지로 지난하고 엄혹한 현실에 주먹에 힘을 주지 않을 수 없다. 그 희비극은 필자의 특유의 개성이자 필연적 문체라고 할 수 있는 사투리의 몫도 상당하다. “현우 니는 뭔 일해가 묵고살 끼고?” 하며 시작해 비규격의 언어들이 귀에 꽂힌다. 문학에서, 출판물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진짜 언어. 이른바 표준어가 아닌, 교양 있는 서울 사람이 쓰는 말이 아닌 언어.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사용하는 언어가 르포의 생동감을 부여한다. ‘그라시재라’의 여성들이 ‘전쟁’과 ‘가난함’을 통과해 서로의 어깨를 걸쳤다면 ‘쇳밥일지’의 청년은 ‘노동’과 ‘부당함’ 통과해 허리를 펴고 세상을 잇는다.

작가 천현우는 용접공이다. 육체 노동자의 자부심으로 기술을 단련하고 성실히 일하지만 하청 노동자의 삶은 각박하기만 하다. 산업재해는 끝없이 일어나고 하청 노동자의 대우는 열악하다 못해 처참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삶에 무엇이라 대답해야 하는가? 그는 말한다. “내일도 사부지기 함 때아 보자이!” 지방 청년과 현장 노동자의 언어로 이를 돌파한다. 이 언어는 우리를 현실에 굴하지 않게 하고 부당함에 맞설 용기를 갖게 하고 결국 사람답게 살게 하는 언어이다.

그 언어가 ‘인 서울’ 대학생의 언어가 아니어도 좋다. 586 정치인의 말씀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 인플루언서의 영향이 아니어도 괜찮다. 이들의 목소리는 현장에서, 각자의 사람에서 현현히 빛난다. 그 빛이 모인다. ‘쇳밥일지’ 아래로, 쇠처럼 단단하고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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