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 윤두서와 다산 정약용-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우석대 석좌교수
2022년 08월 29일(월) 01:00
해남과 강진 일대에 세거하는 해남 윤씨는 대단한 가문이다. 학자나 고관, 문학이나 예술에 뛰어난 분들이 많았던 가문이어서 온 세상에 크게 이름이 알려진 성씨였다. 기묘사화 무렵에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이라는 홍문관 학사로 있던 귤정 윤구(尹衢)는 조광조 선생과 뜻을 같이 했던 분으로 일찍 낙향하여 벼슬은 높이 오르지 못했지만, 최산두·유성춘과 함께 호남 3걸이라는 명성을 얻은 위인이었다. 윤구의 두 아우 또한 문과에 급제해 고관에 올라 해남 윤씨는 온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씨족이 되기에 이르렀다.

귤정의 두 아들 또한 문과 급제로 고관에 오르고 증손자 고산 윤선도에 이르러 학문과 문학으로 한 세상에 이름이 가득하던 학자가 되었다. 효종의 사부이자 예조참의의 지위에 그쳤으나 예학(禮學)에 밝은 학자이자 국문 시조의 작가로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윤선도의 증손자가 바로 공재 윤두서(1668~1715)였으니, 공재는 그림으로 조선 3재의 한 사람에 들어가지만 박학다식한 학자로서도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공재의 외증손자가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으니, 다산의 어머니 해남 윤씨가 바로 공재의 손녀였다.

다산은 여러 글에서 외가 증조부 되는 공재에 대한 애석함을 자주 거론했었다. 공재가 그린 자화상은 뛰어난 그림으로 국보로 지정될 정도의 높은 예술성을 지녔지만, 다산은 공재가 화가에 그치지 않는 큰 학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마치 추사 김정희가 글씨만 잘 쓰는 서예가로만 알려지고, 당대의 탁월한 경학자(經學者)임을 모르듯이, 공재의 학문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다산은 여러 곳에서 설명한 바 있다. “공재께서는 성현의 자질을 타고 나시고 호걸의 뜻을 지니셨기에 저작하신 것에 이러한 종류가 많습니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중형에게) 공재는 성현(聖賢)의 자질을 타고 나셨다니, 이런 말을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산의 안목으로 공재가 성현의 자질을 지니셨다면 보통 분이 아님은 충분히 알 만하다.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공재가 손수 베꼈다는 일본 지도와 조선 지도 한 폭을 보면 공재의 지리학의 수준이 어떤 정도인가도 금방 알게 된다. 중형에게 보낸 편지는 계속 된다. “애석하게도 시대를 잘 못 만났고 수명까지 짧아서(48세) 끝내 벼슬도 못하고 세상을 마쳤습니다. 내외(內外)의 자손 중에서 그분의 피를 한점이라도 얻은 자라면 반드시 뛰어난 기상을 지니고 있을 터인데, 역시 불행한 시대(남인들이 몰락한 시대)를 만나 번성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고산의 집안 해남 윤씨는 대표적인 남인 가문이었다. 기해예송으로 남인과 노론이 싸울 때 고산은 남인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노론과 정면으로 맞서 싸웠기 때문에, 조선 후기 노론이 집권하던 시대가 계속되면서 해남 윤씨는 탄압받는 집안이어서 출세하기가 어려웠었다. 다산 정약용 집안도 남인의 가계였었다. 성현의 자질을 지녔던 공재의 직계 후손들에게야 당연히 공재의 피가 전해졌고, 다산은 외후손으로 한점의 피는 받았겠지만 남인인 때문에 노론 벽파의 강력한 탄압으로 긴긴 유배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노론의 미움을 산 해남 윤씨, 비록 크게 현달할 길이야 없었지만 공재 같은 위인이 나왔고 그의 아들이나 손자도 당대의 화가이자 학자로 큰 명성을 얻었으며, 외증손자인 다산 정약용은 글을 쓰던 그 당시에야 귀양 살던 시절로 불우하기 짝이 없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1818년 다산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났고, 귀양살이 동안 5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을 마쳐, 조선 최고의 학자·사상가·경세가이자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만인의 추앙을 받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공재의 한점 피를 받았던 정약용, 외가 핏줄을 속이지 못한 위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다산은 어렸을 때부터 외가의 피를 이어받은 점을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나의 정분(精分)은 대부분 외가에서 받았다”(吾之精分多受外氏, ‘사암선생연보’)라고 말하여 자신에게는 외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시인했다. “조그마한 공재의 초상화가 집에 남아 있는데, 다산의 얼굴 모습과 수염이 공재를 많이 닮았다”라고 했듯이 다산에게는 외가의 영향이 그렇게 컸었다. 귀양살이 18년에도 대부분의 서적은 외가의 것으로 그 많은 저서도 외가 덕으로 이룩되었다. 그렇다면 호남의 피를 받아 호남에서 이룩한 다산의 학문, 호남 땅에서 실학의 집대성자가 배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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