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는 우리를 어떻게 길들이는가-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2년 08월 08일(월) 01:00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가벼움과 무거움, 이 한 쌍의 표현이 단순히 물리적 무게가 아니고 언행이나 일정한 상황과 일에 대처하는 자세와 태도에 관해서 쓰일 때 이해가 복잡해진다. 이 경우에는 적용 의미가 커져서 사람의 안목과 판단력, 품위 등 전체적인 됨됨이에 관한 평가 표현이 된다. ‘사람이 가볍다’는 표현은 인품과 사고방식의 저급함, 천박함, 심지어는 ‘싸구려’ ‘싼티’ 등의 의미와 연관된다. 특히 태도와 안목으로서의 가벼움은 흔히 왜곡된 자의식과 열등감을 잠시 억압한 과장된 자신감에 그 뿌리가 있다. 이 흉하게 비대해진 자의식의 인간은 시인 휠덜린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린 채, 낯선 땅에서’ 스스로 자신의 우상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언어를 상실한 자는 결국 다른 누군가의 언어를 복제해서 자신의 이름으로 유통하지 않던가.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태도는 흔히 듣는 ‘개의하지 않는다’ ‘연연하지 않는다’ 등의 표현에서 적나라하게 그러나 가볍게 표현된다. 자신의 능력과 성공을 드러내는 우회적 표현인 셈이다. 이 가벼움은 이제 개인의 태도를 넘어서 문화적, 사회적 현상이 되었고, 소위 ‘키치’의 범람을 가져왔다. 순간을 위한 쾌적함, 안락함이며 충분한 가벼움으로 범벅이 된 키치는 본래 미술에서 시작하였다. 키치의 목적과 탄생 배경이 흥미롭게도 당시 사회적 변화와 깊은 상호성이 있다. 키치 미술이라는 표현은 19세기 말에 독일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고급 예술에 비교해서 싸구려 예술품, 복제품, 유사품 등을 칭했다. 키치 미술은 갑작스럽게 부와 힘을 가진 신흥 세력이 귀족과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예술품의 소유를 욕망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신흥 부유층은 돈과 힘은 가졌지만, 정신적·문화적 소외감과 열등감을 쉽게 극복할 수는 없었다. 이들에게 필요한 예술이 곧 키치 미술이었고, 신흥 부유층으로서 성공과 능력을 과시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었다. 예술의 향유는 깊이 있는 정신과 교양의 높은 수준을 인정받기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치 미술은 애초부터 상류층의 미적 취향이나 예술성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저 싼 비용의 가벼운 흉내 내기로 ‘진짜 예술’처럼 보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상류층과 신흥계층의 차이가 비싼 값의 무거움이냐, 싼값의 가벼움이냐로 나눠진 셈이다. 이런 배경을 가진 키치 미술이 지금은 점차 문화·사회·정치를 비롯한 삶의 전 영역으로 확산되면서 대중의 취향과 정체성, 이에 연동된 대중문화의 소비 경향에 거대한 권력을 행사한다.

키치는 우리 일상에 깊숙하고 은밀하지만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가짜와 싸구려로 흉내 내기, 유사품으로 과시하기 등은 이제 불편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흔하고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키치가 초래하는 가장 큰 불행은 작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비판하는 키치의 권력화이다. 쿤데라는 키치의 본질이 ‘이성의 저항을 무력화하고, 감정의 독재’를 초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대중을 쉽게 끌어당기는 키치는 감정을 지배함으로써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권력화된다. 이런 키치의 세계에서는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당한다.’ 질문은 무겁고 불편한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기에 키치의 위험이 있고, 그래서 저항해야 하는 이유도 함께 있다. 쿤데라는 키치가 얼마나 쉽게 가치판단, 취향과 의식을 점령하고 획일주의와 폐쇄주의를 확산시키며, 또 우리는 어떻게 가짜와 유사품의 가치 수호자에 환호하는가를 말한다.

우리가 성장보다는 성공을, 힘의 분배보다 힘의 독점과 확대를 능력으로 여기는 동안 키치는 늘 가볍고 경쾌한 모습으로 감정을 지배할 것이며, 이성은 잠이 들 것이다. 이런 키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식과 정신, 취향마저 키치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는 있다. 키치를 무너뜨리는 힘은 질문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자신을 개방하고 맹목적 추종을 거부하는 것에서 나온다. 고급 문화로 불리는 것에 대한 추종도 키치이기는 마찬가지다. 질문하는 자로서 남아서, 굴종하기를 거부하는 것, 이것이 곧 키치의 가벼움에 길들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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