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과 화순 동림사-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2022년 05월 23일(월) 00:45 가가
다산 정약용과 호남과의 인연은 참으로 끈끈했다. 본래부터 다산의 몸에는 호남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 해남 윤 씨는 해남 출신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요 대학자이자 화가이던 공재 윤두서의 손녀여서 다산에게는 고산과 공재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 태생부터 호남과는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런 다산은 소년 시절 한때 바로 호남에서 살아가기도 했다.
“옛날 무술년(1777년, 정약전 21세, 다산 17세) 겨울 아버지께서 화순 현감으로 계실 때인데, 나와 둘째 형은 동림사(東林寺)에서 독서했다. 40일 만에 나는 ‘맹자’ 한 질을 모두 읽었다. (중형은 ‘서경’을 읽었다.) 미묘한 말과 뜻에 허락해 주심이 많기도 했다. 얼음물로 세수를 하고 이를 닦으며, 눈 내리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토론을 계속했는데, 요순시대의 이상사회를 이룩하는 데 대한 이야기였다.(‘선중씨 정약전 묘지명’)
“무등산 남쪽엔 절이 많은데(瑞陽名修院) / 그 중에 동림사가 가장 그윽하고 아담해(東林特幽爽) / 산골짜기 이 흥취 사랑스러워(愛玆林壑趣) / 잠시나마 조석 문안 멈춰 두었네.(暫辭晨昏養 )” 아버님 곁을 떠나 절간에서 독서한다는 ‘독서동림사’(讀書東林寺)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좌우로 둘러보니 세상 번뇌 사라지고 / 절문에 들자 맑은 생각 일어나네 / 젊은 시절 재주만 믿고 있다간 / 나이 들면 대부분 바보스럽지 / 이를 경계해 느리거나 소홀히 말자구나 / 가는 세월 참으로 허무하거니.” 이런 시를 짓고, 다산은 또 ‘동림사독서기’라는 글을 지어 산문으로 그때의 독서 생활을 소상하게 기록해 놓았다.
경기도 태생으로 서울에서 살아가던 다산은 신관 사또 아버지를 따라 호남 생활을 했다. 화순읍 북쪽으로 5리 지점에 만연사(萬淵寺)라는 절이 있고 그 곁에 동림사가 있었는데(지금은 폐사되어 밭으로 남아 있다), 경치가 너무도 아름답고 그윽하여, 중형과 함께 40일 동안을 독서하며 지냈다. 꿈 많은 두 형제가 눈 내리는 산사의 깊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상사회 건설에 대해 끝없이 토론을 벌이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글이 전해지고 있다. ‘맹자’를 읽던 다산은 맹자 해석에 주자(朱子)나 다른 학자들의 주석을 반대하고 창의적인 새로운 해석, 바로 ‘미묘한 말과 뜻’을 찾아내 중형에게 묻자, 중형이 탁견이라면서 무릎을 치며 동의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니, 조선 최고의 경학자(經學者) 다산의 조숙한 학문 경지는 그때 이미 이룩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다산은 화순에서 살면서 그곳의 선비들과 어울려 무등산에도 오르고 물염정(동복)에도 찾아가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했다. 2년이 넘도록 살아간 화순, 동림사 곁의 만연사에 머물던 당대의 대학승(大學僧)이자 선승(禪僧)이던 연담(蓮潭) 유일(唯一) 스님을 만나 불교에 대한 토론을 했으니, 다산의 학문은 화순에서 벌써 높은 수준에 올랐음도 짐작하게 된다. 인연이란 그렇게도 끈끈한 것인가. 1801년 마흔 살의 다산은 귀양살이를 화순에서 멀지 않고 외가 고을 해남과 인접한 강진에서 보낸다. 무려 18년의 긴긴 세월, 호남은 바로 다산학이 이룩된 고장이자 학문하던 곳이었으니, 다산초당은 바로 조선 실학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다산과 중형 정약전의 꿈과 사상이 키워졌던 동림사는 이미 폐사가 되고 밭으로 변해 아무런 역사적 흔적이 없다. 이렇게 버려두는 것이 옳은 일인가. 조선의 천재 학자 다산과 정약전의 학문이 익어간 그곳을 역사에서 까맣게 잊어서야 되겠는가. 20여 년 전, 나의 외우(畏友) 화순 출신 강동원(姜東遠) 형이 폐허로 남아 있는 동림사 이야기를 듣더니, “세상을 경륜할 다산 형제의 꿈이 싹튼 곳이 동림사인데, 비록 절이야 없어졌지만 흔적만이라도 남겨야 한다”라면서 기념비라도 하나 세우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면서 자비로 거금을 희사하여 큰 비 하나를 세웠다. 동림사터 입구에 ‘다산 정약용 선생 동림사독서기비(茶山丁若鏞先生 東林寺讀書記碑)’를 덩실하게 세웠다. 다산이 직접 지은 ‘동림사독서기’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새기고 내력을 간단히 기록해, 이제는 훌륭한 기념비로 남아 있다. 번역문은 내가 번역하고 간단한 설명도 내가 달았다.
‘현인이 지나간 곳은 산천도 빛이 난다’(賢人所過之地 山川有光)’라는 옛말이 있다. 다산의 학문이 익었던 동림사, 얼마나 의미가 깊고 역사성이 높은 곳인가. 그곳을 잊지 않도록 비를 세워준 강동원 형의 뜨거운 학문 사랑 마음은 얼마나 훌륭한 뜻인가. 아무도 찾지 않는 동림사, 이제는 한 번쯤 찾아가 다산과 그의 중형을 생각하고 거기에서 다산학의 모태가 키워졌음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경기도 태생으로 서울에서 살아가던 다산은 신관 사또 아버지를 따라 호남 생활을 했다. 화순읍 북쪽으로 5리 지점에 만연사(萬淵寺)라는 절이 있고 그 곁에 동림사가 있었는데(지금은 폐사되어 밭으로 남아 있다), 경치가 너무도 아름답고 그윽하여, 중형과 함께 40일 동안을 독서하며 지냈다. 꿈 많은 두 형제가 눈 내리는 산사의 깊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상사회 건설에 대해 끝없이 토론을 벌이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글이 전해지고 있다. ‘맹자’를 읽던 다산은 맹자 해석에 주자(朱子)나 다른 학자들의 주석을 반대하고 창의적인 새로운 해석, 바로 ‘미묘한 말과 뜻’을 찾아내 중형에게 묻자, 중형이 탁견이라면서 무릎을 치며 동의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니, 조선 최고의 경학자(經學者) 다산의 조숙한 학문 경지는 그때 이미 이룩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다산은 화순에서 살면서 그곳의 선비들과 어울려 무등산에도 오르고 물염정(동복)에도 찾아가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했다. 2년이 넘도록 살아간 화순, 동림사 곁의 만연사에 머물던 당대의 대학승(大學僧)이자 선승(禪僧)이던 연담(蓮潭) 유일(唯一) 스님을 만나 불교에 대한 토론을 했으니, 다산의 학문은 화순에서 벌써 높은 수준에 올랐음도 짐작하게 된다. 인연이란 그렇게도 끈끈한 것인가. 1801년 마흔 살의 다산은 귀양살이를 화순에서 멀지 않고 외가 고을 해남과 인접한 강진에서 보낸다. 무려 18년의 긴긴 세월, 호남은 바로 다산학이 이룩된 고장이자 학문하던 곳이었으니, 다산초당은 바로 조선 실학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다산과 중형 정약전의 꿈과 사상이 키워졌던 동림사는 이미 폐사가 되고 밭으로 변해 아무런 역사적 흔적이 없다. 이렇게 버려두는 것이 옳은 일인가. 조선의 천재 학자 다산과 정약전의 학문이 익어간 그곳을 역사에서 까맣게 잊어서야 되겠는가. 20여 년 전, 나의 외우(畏友) 화순 출신 강동원(姜東遠) 형이 폐허로 남아 있는 동림사 이야기를 듣더니, “세상을 경륜할 다산 형제의 꿈이 싹튼 곳이 동림사인데, 비록 절이야 없어졌지만 흔적만이라도 남겨야 한다”라면서 기념비라도 하나 세우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면서 자비로 거금을 희사하여 큰 비 하나를 세웠다. 동림사터 입구에 ‘다산 정약용 선생 동림사독서기비(茶山丁若鏞先生 東林寺讀書記碑)’를 덩실하게 세웠다. 다산이 직접 지은 ‘동림사독서기’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새기고 내력을 간단히 기록해, 이제는 훌륭한 기념비로 남아 있다. 번역문은 내가 번역하고 간단한 설명도 내가 달았다.
‘현인이 지나간 곳은 산천도 빛이 난다’(賢人所過之地 山川有光)’라는 옛말이 있다. 다산의 학문이 익었던 동림사, 얼마나 의미가 깊고 역사성이 높은 곳인가. 그곳을 잊지 않도록 비를 세워준 강동원 형의 뜨거운 학문 사랑 마음은 얼마나 훌륭한 뜻인가. 아무도 찾지 않는 동림사, 이제는 한 번쯤 찾아가 다산과 그의 중형을 생각하고 거기에서 다산학의 모태가 키워졌음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