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들 너머로 사실들이 되돌아올 때-심 옥 숙 인문지행 대표
2021년 12월 20일(월) 04:00 가가
요즘은 매일 거짓과 사실, 가면과 진짜가 벌이는 희한한 무도회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 모든 상황이 참담하도록 답답하기만 하다. 왜 우리는 거짓에 담담하지 않으면서도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하는가. 거짓으로 하는 말과 행동이 성공하는 과정과 구조를 들여다보면 매우 당혹스럽다. 거짓은 단순히 반복되고 증식되는 것이 아니다. 거짓은 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며, 진실을 위조하고 권력이 된다.
이런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은 거짓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와 맞물려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진실 또는 사실 전체가 아니고, 진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진실을 요구하는 자세 자체가 거짓이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원하는 선택적 진실만을 요구하며, 조각난 진실의 일부를 전부로 확대한다. 진실을 원하는 자세의 온전한 의미는 개인, 공적 소속 영역, 조직 관계 등에 상관없이 진실이 어떤 모습이든 진실의 총체를 요구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불리하거나 또는 원하지 않는 진실 또한 은폐하지 않는 것이다.
거짓이 제대로 작동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자신이 조작한 내용이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도 의심받지 않을 것이라는 오만한 확신과 자기기만에서 시작된다. 이런 자기기만의 성공이 가져다주는 치명적 달콤함에서 멈출 수 없는 중독성이 나온다. 그래서 거짓은 반복되고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짓이 ‘진실’이 되려면 또 다른 한 축이 있어야 한다. ‘거짓의 진실성’을 보증하며 거들어 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거짓으로 얻는 대가와 결과가 클수록, 거드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거짓은 죄의식 없는 진실의 가면을 쓰고 진실 놀이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거짓 또한 대화적인 특징이 있다. 거짓은 상대방의 다양한 이득과 심리적 상태와 연결되는 부분이 클수록 잘 작동된다. 다시 말하면 거짓은 단순히 강요되거나 속이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동의를 기반으로 해서 권력이 된다. 결국 거짓은 진실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힘이자 법으로 군림한다. 법이 된 거짓은 진실과 거짓을 결정하고, 개인은 이익을 위한 어떤 거짓도 위조도 마다하지 않는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지속적인 거짓’에 의해서 ‘진실과 거짓의 차이는 부식된다’고 말한다. 거짓은 진실을 왜곡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진실을 대체한다. 거짓과 가짜가 삶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 내는 능력으로 자리를 잡는다. 가짜가 사실과 진실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거짓을 수단으로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기대에 맞게 ‘진실들’을 조절하고 조작하기 하기 때문이다. 사실에 충실한 진실은 때대로 불편함과 혼란스러운 감정을 일으키지만 거짓은 자극적인 입맛에 맞춰지기 때문이다. 이런 거짓들은 지지하는 여론을 딛고 합법적인 ‘진실’이 된다. 이 거짓의 작동 구조를 잘 이용한 사람들은 남보다 조금 더 ‘돋보이고 싶어서’ 행한 거짓이 왜 문제고 죄냐고 항변한다.
아렌트는 거짓과 가짜의 세계를 넘기 위해서는 진실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진실은 전체적 맥락을 통해서 나타나며, 거짓은 이 맥락을 끊어 내거나 위조하면서 세력을 키운다. 이런 의미에서 거짓과 가짜는 맥락과 상황을 엿보거나 이용하면서 요란하게 튀어나온다. 그러나 이 맥락은 견고하기 때문에 거짓이 한순간 왜곡하거나 혼란스럽게 할 수는 있어도 완전하게 파괴할 수는 없다. 진실은 결코 파괴되지 않으며, 결국 복원된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알리는 ‘사실들이 되돌아왔을 때’ 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다. 진실에 대한 실망으로 다시 가짜와 거짓의 이미지 세계로 도피하는 것은 어리석고도 어리석다. 도피 대신에 묻혔던 ‘사실들의 귀환’에 감사하고 환영하며 그 소리에 귀를 여는 것이다. 거짓은 세상에는 믿을 것도, 귀한 것도 없다고 소곤댄다. 이런 거짓보다 더 끔찍하고 냉소적인 거짓은 없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아렌트가 말하는 것처럼 거짓의 권력을 무력화하는 하는 능력이 여전히 있다. 함께하며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것, 더 나은 현실의 변화를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지속적인 거짓’에 의해서 ‘진실과 거짓의 차이는 부식된다’고 말한다. 거짓은 진실을 왜곡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진실을 대체한다. 거짓과 가짜가 삶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 내는 능력으로 자리를 잡는다. 가짜가 사실과 진실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거짓을 수단으로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기대에 맞게 ‘진실들’을 조절하고 조작하기 하기 때문이다. 사실에 충실한 진실은 때대로 불편함과 혼란스러운 감정을 일으키지만 거짓은 자극적인 입맛에 맞춰지기 때문이다. 이런 거짓들은 지지하는 여론을 딛고 합법적인 ‘진실’이 된다. 이 거짓의 작동 구조를 잘 이용한 사람들은 남보다 조금 더 ‘돋보이고 싶어서’ 행한 거짓이 왜 문제고 죄냐고 항변한다.
아렌트는 거짓과 가짜의 세계를 넘기 위해서는 진실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진실은 전체적 맥락을 통해서 나타나며, 거짓은 이 맥락을 끊어 내거나 위조하면서 세력을 키운다. 이런 의미에서 거짓과 가짜는 맥락과 상황을 엿보거나 이용하면서 요란하게 튀어나온다. 그러나 이 맥락은 견고하기 때문에 거짓이 한순간 왜곡하거나 혼란스럽게 할 수는 있어도 완전하게 파괴할 수는 없다. 진실은 결코 파괴되지 않으며, 결국 복원된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알리는 ‘사실들이 되돌아왔을 때’ 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다. 진실에 대한 실망으로 다시 가짜와 거짓의 이미지 세계로 도피하는 것은 어리석고도 어리석다. 도피 대신에 묻혔던 ‘사실들의 귀환’에 감사하고 환영하며 그 소리에 귀를 여는 것이다. 거짓은 세상에는 믿을 것도, 귀한 것도 없다고 소곤댄다. 이런 거짓보다 더 끔찍하고 냉소적인 거짓은 없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아렌트가 말하는 것처럼 거짓의 권력을 무력화하는 하는 능력이 여전히 있다. 함께하며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것, 더 나은 현실의 변화를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