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의 두 얼굴 그리고 문(門)의 안과 밖-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1년 10월 25일(월) 05:00 가가
‘야누스의 두 얼굴’이라는 말을 칭찬으로 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겉과 속이 다르거나 앞과 뒤가 맞지 않는 사람을 흔히 야누스에 비유한다. 이는 위선자라는 비난과 다를 바 없다. 앞과 뒤가 한결같은 사람은 물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드물다. 그런데 요즘은 시절이 시절인지라 상대방을 위선의 얼굴을 한 야누스에 빗대는 일들을 더 흔하게 본다. 하지만 알고 보면 야누스의 두 얼굴에 대한 비난의 비유는 우습게도 무지와 오해에서 나온 것이어서 바로잡아야 할 것이 들어 있다.
야누스의 두 얼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가능하다. 하나는 위선과 가면의 야누스지만, 다른 야누스는 서로 다른 가치의 차이를 상호 보완하고 균형 잡힌 토대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능력에 대한 비유다. 위선을 상징하는 두 얼굴을 한 야누스는 이미 너무나 많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와 미래 사이를 연결하고 새로운 길을 내는 막중한 역할을 하는 그런 야누스다. 이렇게 보면 두 얼굴의 야누스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항상 가치의 선택이다.
야누스는 로마의 고유한 신화에서 등장하는 ‘문의 신’으로 앞과 뒤에 서로 다른 두 얼굴을 가졌다. 문은 크기와 용도에 관계없이 안쪽과 바깥쪽이 있다. 우리는 문을 안쪽에서 사용해서 이동하면 나간다고 말하고, 바깥에서 안을 향하면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 간단하며 평범한 말 속에 애써 야누스라는 문의 신까지 만들어 가며 강조하는 속 깊은 사정이 있다.
문은 안과 밖이라는 두 얼굴을 통해서 안과 밖의 경계를 짓고 서로의 차이를 구분한다. 안은 밖의 세상으로 보호되어야 할 영역이고, 밖은 관계를 맺고 일정한 행동을 하면서 변화를 도모하는 세상의 영역이다. 그래서 문은 안과 밖을 구분하고 밖으로부터 안을 지키는 것에서 그 역할을 끝내지 않는다. 이 지점에 야누스에게 왜 두 얼굴이 필요한가에 대한 답이 있다.
새로운 출발과 시작을 위해서는 반드시 문을 열고 안으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곧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문은 익숙하고 편하지만 고립된 어제와 결별하는 장소이고, 낡은 생각과 구시대적 습관을 버리는 것이며, 새로운 시도와 길에 대한 표현이자 상징인 것이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지고 편하다 못해서 앞뒤가 구분되지 않는 말과 생각, 시대를 역행하는 행동에는 과거를 향해 잠긴 문이 있다. 여기에 과거의 흔적만 있을 뿐 미래의 문은 보이지 않는다. 과거로 향한 문의 안쪽이 두려워하는 것은 미래와 함께 오는 변화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에 의하면 문의 신은 신들의 모임에 첫 번째로 입장하는 특권을 가졌다. 아무리 대단한 로마의 신들이라고 할지라도 문의 신이 앞장서서 문을 열지 않고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재치 넘치는 이야기다. 닫힌 문이 먼저 열려야 다음의 모든 일이 제대로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문을 누가 여는가가 문제다.
문은 안에서만 열리는 것이므로, 문을 여는 일은 안에 있는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1년 중 다시 새해가 시작되는 1월이 서양에서는 ‘야누스의’ 달이 되고 새해 첫날 야누스에게 정성껏 제물을 바쳤다. 한 해가 시작되는 시간의 문이 열린다는 의미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매일 실제적 문뿐만 아니라, 비유로서의 문을 수없이 열고 닫는다. 관계의 문, 악습의 문, 대화의 문, 역사의 문 등등 다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문의 안과 밖에 있다.
어떤 문을 닫고 어떤 문을 열 것인가는 우리 자신이 정한다. 다만 이 선택이 감정과 망상적 기대와 단순한 끌림에 따르는 것이라면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걸어 잠그는 것이다. 문은 열지 않으면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차단되고 고립되는 벽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문은 두 얼굴을 가지고 안과 바깥 사이에 놓여 있으면서 동시에 허물기 어려운 단절의 벽이 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문이 닫힌 상황에서도 미래의 길을 향한 문을 여는 것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유일한 선택일 것이다. 수잔 손탁을 빌어서 말하자면 어떤 사건에 대해서 또는 어떤 상황이든, 크게 실망하고 분노하더라도 그러나 함께 바보가 되지는 말자는 것이다.
새로운 출발과 시작을 위해서는 반드시 문을 열고 안으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곧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문은 익숙하고 편하지만 고립된 어제와 결별하는 장소이고, 낡은 생각과 구시대적 습관을 버리는 것이며, 새로운 시도와 길에 대한 표현이자 상징인 것이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지고 편하다 못해서 앞뒤가 구분되지 않는 말과 생각, 시대를 역행하는 행동에는 과거를 향해 잠긴 문이 있다. 여기에 과거의 흔적만 있을 뿐 미래의 문은 보이지 않는다. 과거로 향한 문의 안쪽이 두려워하는 것은 미래와 함께 오는 변화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에 의하면 문의 신은 신들의 모임에 첫 번째로 입장하는 특권을 가졌다. 아무리 대단한 로마의 신들이라고 할지라도 문의 신이 앞장서서 문을 열지 않고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재치 넘치는 이야기다. 닫힌 문이 먼저 열려야 다음의 모든 일이 제대로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문을 누가 여는가가 문제다.
문은 안에서만 열리는 것이므로, 문을 여는 일은 안에 있는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1년 중 다시 새해가 시작되는 1월이 서양에서는 ‘야누스의’ 달이 되고 새해 첫날 야누스에게 정성껏 제물을 바쳤다. 한 해가 시작되는 시간의 문이 열린다는 의미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매일 실제적 문뿐만 아니라, 비유로서의 문을 수없이 열고 닫는다. 관계의 문, 악습의 문, 대화의 문, 역사의 문 등등 다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문의 안과 밖에 있다.
어떤 문을 닫고 어떤 문을 열 것인가는 우리 자신이 정한다. 다만 이 선택이 감정과 망상적 기대와 단순한 끌림에 따르는 것이라면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걸어 잠그는 것이다. 문은 열지 않으면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차단되고 고립되는 벽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문은 두 얼굴을 가지고 안과 바깥 사이에 놓여 있으면서 동시에 허물기 어려운 단절의 벽이 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문이 닫힌 상황에서도 미래의 길을 향한 문을 여는 것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유일한 선택일 것이다. 수잔 손탁을 빌어서 말하자면 어떤 사건에 대해서 또는 어떤 상황이든, 크게 실망하고 분노하더라도 그러나 함께 바보가 되지는 말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