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빈 정신’ 이어 가려면
2021년 08월 25일(수) 01:30 가가
‘불사조’일 것만 같았던 김홍빈 대장은 끝내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브로드피크(8047m) 정상에 오른 뒤 하산 도중 실종된 그의 생환을 염원하는 국민의 간절한 기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헬기 수색에도 정확한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 산악인장’으로 장례가 진행됐고 그의 영정은 무등산 문빈정사에 안치됐다.
김 대장이 장애인 등반가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座) 완등이라는 기적의 드라마를 쓴 지도 벌써 한 달여가 지났다. 한데 금방이라도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돌아와 “히말라야의 기를 나눠 주겠다”며 조막손을 내밀 것만 같다.
도전 의식과 연대 그리고 희망 나눔
김 대장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97년 유럽 최고봉 엘브루즈(5642m) 원정에 나설 무렵이었다. 그때 산악인에게는 생명선이나 다름없는 열 손가락이 없는데도 뼈를 깎는 노력으로 다시 고산 등반을 시작한 그의 투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앞서 1991년 맥킨리(6194m) 조난 사고로 열 손가락을 모두 잃었던 것이다. 이후 세계 7대륙 최고봉과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들을 오르는 과정을 줄곧 취재·보도하면서 그의 한없는 열정과 고난의 여정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2008년 말 한 달여의 일정으로 남극 대륙 최고봉 빈슨 매시프(4897m)에 도전했을 때는 그의 자일 파트너가 되어 함께 오르기도 했다. 7대륙 최고봉 등정을 마무리하는 참으로 의미 있는 등반이었다. 원정대장인 그를 제외하고 유일한 대원이었던 기자는 등반 과정에서 김 대장의 손 역할을 충실히 해야 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양말 신기, 등산복 지퍼 올리기, 신발 끈 묶기, 침낭 및 고소용 원피스를 압축해 주머니에 갈무리하기, 텐트 치기 등…. 김 대장 혼자서는 쉽지 않은 일들을 거드는 데 버벅대기 일쑤였다.
체력과 등반 기술이야 애초부터 김 대장을 따라갈 수는 없는 일. 그러니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제야 김 대장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착각이자 오산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날은 심한 자괴감에 텐트에 엎드려 장문의 반성문을 쓰기도 했다. 이심전심이었을까. 김 대장도 이때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두 손이 있을 땐/ 나만을 위했습니다./ 두 손을 잃고 나서야/ 다른 사람이 보였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만큼/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새로운 손이/ 그렇게 말합니다.” ‘남극에서’라는 부제가 달린 ‘손’이라는 제목의 이 시에는 김 대장의 삶에 대한 태도와 등반 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 이후 그는 해외 원정 때마다 이 글을 계획서 표지에 실어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잡곤 했다.
등반가들 사이에는 ‘고도(高度)보다는 태도(態度)’라는 말이 있다. 얼마나 높이 올랐느냐보다 어떤 과정을 거쳐 정상에 도달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김 대장은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든 것이 갖춰진 도전은 더 이상 도전이 아니다.”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천 번을 시도하여 움켜잡는 것이 도전이다.” 손가락을 모두 잃고 폐수종과 뇌부종까지 겹쳐 고소 적응조차 힘들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담금질함으로써 삶을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장애인으로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Terra Incognita)을 개척해 나갔다.
김 대장이 7대륙 최고봉과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모두 오르는 데는 24년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 두세 번 시도한 경우까지 합치면 원정 횟수만 35차례나 된다. 이처럼 담대한 도전을 쉼 없이 이어가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불굴의 의지와 투혼이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늘 다음 목표가 세워져 있었다. 그는 브로드피크 원정을 떠나면서도 기자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다음에는 북극점에 꼭 함께 갑시다.” 그는 그때 이미 지구 3대 극점(極點)까지 모두 도달하는 ‘산악 그랜드슬램’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담대한 도전이 가능했던 또 하나의 원동력은 아마도 연대 의식일 것이다. 산악 선후배들이 그의 손이 되어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처럼 그 역시 정상에 오른 것을 ‘나의 등정이 아닌 모두의 등정’으로 여겼다. 지역사회와도 늘 함께 호흡하려 했다. 2017년 로체(8516m) 등반 때는 5·18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5월 18일을 등정일로 잡았다. 그리고 정상의 희박한 공기 속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힘차게 불렀다.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나 세계수영선수권 등을 앞두고는 대회의 성공적 유치와 개최를 응원했다. 브로드피크 정상에 올라선 뒤에도 코로나로 고통받는 국민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했다. 그러면서도 가족에게는 만약에 자신이 사고를 당했을 경우 수색 활동으로 2차 사고가 나지 않도록 절대 무리한 구조는 하지 말아 달라고 떠나기 전에 당부했다고 한다.
김 대장은 또한 자신의 경험을 장애인 및 청소년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했다. 산에 오르고 싶어도 쉬 가지 못하는 그들과 산행을 함께하며 도전 정신과 용기를 불어넣어 줌으로써 ‘희망 전도사’로 불렸다. 히말라야 원정 때도 장애인들을 참여시켜 한계 극복의 의지를 다졌다. 몇 년 전부터는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김홍빈과 희망 만들기’라는 사단법인을 만들어 그의 꿈을 성원해 왔다.
영웅의 업적 기리는 기념관 건립을
김 대장이 그동안 초인적인 노력으로 이뤄 낸 성과는 그야말로 인간 승리라 할 만하다. 거기엔 불굴의 도전 정신과 연대 의식 그리고 희망 나눔이 밑바탕이 되었다. 이를 ‘김홍빈 정신’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그의 이야기는 교과서에 실어 미래 세대의 귀감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우리 사회가 이어가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정부가 그에게 최고 등급의 체육훈장인 청룡장을 추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 대장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 가기 위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그의 발자취와 업적을 기리고 보존할 수 있도록 기념관을 건립하는 게 좋겠다. 이미 문화체육관광부와 광주시도 이에 공감하며 지원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여기에는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뒤 2011년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도중 실종된 박영석 대장을 기리는 ‘서울시 산악문화체험센터’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념관에는 당연히 김 대장이 사용했던 장비나 등반 영상·사진을 볼 수 있는 전시실이 있어야겠지만, 국제대회를 치를 인공암벽 경기장도 함께 마련했으면 한다. 여기에 김 대장이 늘 소망했던 히말라야 고소체험용 감압실(減壓室)이나 산악문화관 그리고 안전체험관까지 갖추면 더욱 좋겠다. 사회 양극화와 코로나 확산으로 좌절하기 쉬운 시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중단 없는 도전으로 희망을 함께 나누는 ‘김홍빈 정신’ 아니겠는가.
도전 의식과 연대 그리고 희망 나눔
김 대장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97년 유럽 최고봉 엘브루즈(5642m) 원정에 나설 무렵이었다. 그때 산악인에게는 생명선이나 다름없는 열 손가락이 없는데도 뼈를 깎는 노력으로 다시 고산 등반을 시작한 그의 투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앞서 1991년 맥킨리(6194m) 조난 사고로 열 손가락을 모두 잃었던 것이다. 이후 세계 7대륙 최고봉과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들을 오르는 과정을 줄곧 취재·보도하면서 그의 한없는 열정과 고난의 여정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두 손이 있을 땐/ 나만을 위했습니다./ 두 손을 잃고 나서야/ 다른 사람이 보였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만큼/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새로운 손이/ 그렇게 말합니다.” ‘남극에서’라는 부제가 달린 ‘손’이라는 제목의 이 시에는 김 대장의 삶에 대한 태도와 등반 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 이후 그는 해외 원정 때마다 이 글을 계획서 표지에 실어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잡곤 했다.
등반가들 사이에는 ‘고도(高度)보다는 태도(態度)’라는 말이 있다. 얼마나 높이 올랐느냐보다 어떤 과정을 거쳐 정상에 도달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김 대장은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든 것이 갖춰진 도전은 더 이상 도전이 아니다.”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천 번을 시도하여 움켜잡는 것이 도전이다.” 손가락을 모두 잃고 폐수종과 뇌부종까지 겹쳐 고소 적응조차 힘들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담금질함으로써 삶을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장애인으로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Terra Incognita)을 개척해 나갔다.
김 대장이 7대륙 최고봉과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모두 오르는 데는 24년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 두세 번 시도한 경우까지 합치면 원정 횟수만 35차례나 된다. 이처럼 담대한 도전을 쉼 없이 이어가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불굴의 의지와 투혼이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늘 다음 목표가 세워져 있었다. 그는 브로드피크 원정을 떠나면서도 기자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다음에는 북극점에 꼭 함께 갑시다.” 그는 그때 이미 지구 3대 극점(極點)까지 모두 도달하는 ‘산악 그랜드슬램’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담대한 도전이 가능했던 또 하나의 원동력은 아마도 연대 의식일 것이다. 산악 선후배들이 그의 손이 되어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처럼 그 역시 정상에 오른 것을 ‘나의 등정이 아닌 모두의 등정’으로 여겼다. 지역사회와도 늘 함께 호흡하려 했다. 2017년 로체(8516m) 등반 때는 5·18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5월 18일을 등정일로 잡았다. 그리고 정상의 희박한 공기 속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힘차게 불렀다.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나 세계수영선수권 등을 앞두고는 대회의 성공적 유치와 개최를 응원했다. 브로드피크 정상에 올라선 뒤에도 코로나로 고통받는 국민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했다. 그러면서도 가족에게는 만약에 자신이 사고를 당했을 경우 수색 활동으로 2차 사고가 나지 않도록 절대 무리한 구조는 하지 말아 달라고 떠나기 전에 당부했다고 한다.
김 대장은 또한 자신의 경험을 장애인 및 청소년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했다. 산에 오르고 싶어도 쉬 가지 못하는 그들과 산행을 함께하며 도전 정신과 용기를 불어넣어 줌으로써 ‘희망 전도사’로 불렸다. 히말라야 원정 때도 장애인들을 참여시켜 한계 극복의 의지를 다졌다. 몇 년 전부터는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김홍빈과 희망 만들기’라는 사단법인을 만들어 그의 꿈을 성원해 왔다.
영웅의 업적 기리는 기념관 건립을
김 대장이 그동안 초인적인 노력으로 이뤄 낸 성과는 그야말로 인간 승리라 할 만하다. 거기엔 불굴의 도전 정신과 연대 의식 그리고 희망 나눔이 밑바탕이 되었다. 이를 ‘김홍빈 정신’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그의 이야기는 교과서에 실어 미래 세대의 귀감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우리 사회가 이어가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정부가 그에게 최고 등급의 체육훈장인 청룡장을 추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 대장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 가기 위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그의 발자취와 업적을 기리고 보존할 수 있도록 기념관을 건립하는 게 좋겠다. 이미 문화체육관광부와 광주시도 이에 공감하며 지원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여기에는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뒤 2011년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도중 실종된 박영석 대장을 기리는 ‘서울시 산악문화체험센터’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념관에는 당연히 김 대장이 사용했던 장비나 등반 영상·사진을 볼 수 있는 전시실이 있어야겠지만, 국제대회를 치를 인공암벽 경기장도 함께 마련했으면 한다. 여기에 김 대장이 늘 소망했던 히말라야 고소체험용 감압실(減壓室)이나 산악문화관 그리고 안전체험관까지 갖추면 더욱 좋겠다. 사회 양극화와 코로나 확산으로 좌절하기 쉬운 시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중단 없는 도전으로 희망을 함께 나누는 ‘김홍빈 정신’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