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열 광주 온교회 담임목사] 아빠에서 아버지로 그리고 다시 아빠로
2021년 05월 20일(목) 22:40 가가
‘가정의 달’이라 불리는 오월은 어느 때보다 가족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넘치는 달이다. 공교롭게도 무엇을 선물해야 할지 고민도 커가고 지출도 많아진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는 복음서의 말씀처럼 사랑하는 가족에게 지출이 따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우습겠지만 근로자의 날로 시작하니 가정의 달을 위한 특별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근로자들의 사기도 올라가고 가정의 달 특별한 지출에 부담도 덜어주고 말이다.
라디오를 듣는 중에 오월에 지출이 많게 되니 일 년 동안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재무상담사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역설적이게도 가정의 달 오월은 가장 부담스러운 달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부모님 챙기고 자녀도 챙기고 아내를 빼 놓을 수 없으니 부부의 날에는 꽃다발과 선물도 준비해야 하지 않은가. 상대적으로 아빠의 지갑이 비는 만큼 한숨이 깊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하기에 아버지의 어깨는 오월이 가장 무거운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아빠에 대한 나의 추억은 이렇다. 아빠가 일을 마치고 퇴근할 무렵에 동생과 함께 동구 밖까지 마중을 나가곤 했다. 자전거를 타고 오시는 아빠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뛰어가면 자전거를 멈추시고 나는 뒷자리에 동생은 앞자리에 앉히고 집으로 향하셨다. 비포장 도로를 달리며 덜컹거릴 때 마다 딱딱한 뒷자리의 통증으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아빠의 등을 꼭 껴안고 있는 것이 훨씬 푸근하고 따뜻했기에 참아 낼 수 있었다.
엄마는 퇴근하시는 아빠를 기다리며 된장찌개를 끓이시고 우리 가족은 한 상에 둘러 앉아 맛난 저녁을 먹곤 했다. 가끔 일찍 잠들어 버린 나를 번쩍 들어 자리를 옮겨 주실 때면 분명히 깼음에도 그 기분이 좋아 잠자는 척을 계속했다. 나를 그런 자세로 번쩍 들어 올릴 수 있는 분은 세상에서 오직 아빠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빠가 나를 들어서 옮기지 못하게 될 무렵부터 아빠를 아버지라 부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후 어린 나는 철이 들어 듬직해져 갔지만 왠지 아버지와의 관계는 데면데면해져 갔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는 대학생 자녀를 둔 아버지가 되었고 나의 아버지는 팔순을 넘어 구순을 향하여 가고 있다. 이제 노인이 되어 버린 아버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든 자녀들은 아버지라는 호칭을 쓰는데 아버지는 당신을 가리킬 때 아빠라고 하셨다. “아빠는 괜찮다” “아빠가 이제 몸이 약해 졌다” 이렇게 스스로를 아빠라 칭하신다. 내가 아버지라 부른지도 40년 가까이 되는데 말이다.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딸들이 아빠라 불러 주던 때를 그리워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개역개정) 하나님은 저 하늘 멀리 있고 무서운 눈으로 심판을 하려고 벼르고 있는 신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든든한 힘이 되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또한 아빠로서 친근함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며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 하고 계시고 친밀한 관계를 바라고 계시는 분임을 잘 표현해 주는 구절이라 하겠다. 어쩜 우리의 아버지들도 아빠라 부르며 언제든지 뛰어와 품에 안기던 자녀들의 천진난만한 때를 다시 보고 싶지는 않으실까?
아빠라 부르며 눈높이를 맞추어 웃음꽃을 피웠던 어린 시절, 존경스럽고 인생의 선배로 든든한 바위로 여겨지던 아버지, 백발이 되어 늙고 약해지신 아빠, 다시 아빠라 불러 보면 안 되겠는가? 등급이 없는 저 무등산처럼 우리의 아빠는 등급이 없다. 부자이든 가난하든 많이 배웠든 배우지 못했든 아버지의 등은 이 시대의 진정한 무등이 아닐 수 없다. 부모님께 돈을 드려도 좋고 마음 담은 선물을 드려도 좋다. 오늘은 다시 용기를 내어 어린 시절 아빠와의 추억을 떠 올리며 아빠라고 불러 드려 보자.
내 나이 50, 60이 되었어도 구순이 되신 아버지를 감히 아빠라 불러 드려 보자.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거나 곁에 계시지 않는다면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으로 “아빠”라 큰 소리로 불러 보자.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는 대학생 자녀를 둔 아버지가 되었고 나의 아버지는 팔순을 넘어 구순을 향하여 가고 있다. 이제 노인이 되어 버린 아버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든 자녀들은 아버지라는 호칭을 쓰는데 아버지는 당신을 가리킬 때 아빠라고 하셨다. “아빠는 괜찮다” “아빠가 이제 몸이 약해 졌다” 이렇게 스스로를 아빠라 칭하신다. 내가 아버지라 부른지도 40년 가까이 되는데 말이다.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딸들이 아빠라 불러 주던 때를 그리워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개역개정) 하나님은 저 하늘 멀리 있고 무서운 눈으로 심판을 하려고 벼르고 있는 신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든든한 힘이 되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또한 아빠로서 친근함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며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 하고 계시고 친밀한 관계를 바라고 계시는 분임을 잘 표현해 주는 구절이라 하겠다. 어쩜 우리의 아버지들도 아빠라 부르며 언제든지 뛰어와 품에 안기던 자녀들의 천진난만한 때를 다시 보고 싶지는 않으실까?
아빠라 부르며 눈높이를 맞추어 웃음꽃을 피웠던 어린 시절, 존경스럽고 인생의 선배로 든든한 바위로 여겨지던 아버지, 백발이 되어 늙고 약해지신 아빠, 다시 아빠라 불러 보면 안 되겠는가? 등급이 없는 저 무등산처럼 우리의 아빠는 등급이 없다. 부자이든 가난하든 많이 배웠든 배우지 못했든 아버지의 등은 이 시대의 진정한 무등이 아닐 수 없다. 부모님께 돈을 드려도 좋고 마음 담은 선물을 드려도 좋다. 오늘은 다시 용기를 내어 어린 시절 아빠와의 추억을 떠 올리며 아빠라고 불러 드려 보자.
내 나이 50, 60이 되었어도 구순이 되신 아버지를 감히 아빠라 불러 드려 보자.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거나 곁에 계시지 않는다면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으로 “아빠”라 큰 소리로 불러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