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의 화양연화
2020년 10월 30일(금) 00:00 가가
종교계에 몸담고 있다 보니 남들보다 더 자주 죽음을 접합니다. 자주 죽음을 이야기하고 또 그런 모습을 주변 사람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심근 경색으로 한 번 쓰러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의 죽음을 지극히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나는 죽는다’의 그 ‘언젠가’가 당장 내일, 아니 지금 이 순간 불쑥 찾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죽겠지…’라고 생각하며 삶을 재조명하는 것, 그래서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분석하는 것은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욕심이었다는 것도 이제는 압니다. 대신 언제부터인가 조용히 내 곁을 지키는 죽음이란 친구를 가끔 발견합니다. 죽음은 나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항상 나와 함께하는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어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잠시 완화된 덕분에 모처럼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오가는 대화와 앞에 놓인 음식을 보며 ‘다들 왜 이렇게 살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노골적으로, 아니면 이런저런 명분으로 치장된 욕망과 그런 욕망이 뿜어 내는 열기가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라고 별반 다를 것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을 보며 그들 중의 한 사람인 나를 보았습니다. 우리들의 삶을 한걸음 떨어져 바라보았습니다. 숨 한번 들이키고 내쉬는 사이 사이에 죽음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엔 인스타그램에서 행복한 순간을 보내는 친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해질 무렵, 한갓진 잔디 광장 같은 곳에서 여럿이 어울려 요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혀 특별할 것도 없는 모습이 왜 그리 행복해 보이는지요. 아무런 이유없이 그 삶이 무척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본인도 느낀 바가 있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렸겠지만,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빛나는 시간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뻔뻔하고 노골적인 욕망을 ‘노골적으로’ 숨기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상적인 삶 뿐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지만 동시에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삶에서도 무상(無常)의 향기가 배어납니다. 생(生)이 가장 빛날 때, 사(死) 역시 자신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법입니다. 생과 사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니까요. 대개 이럴 때 사람들은 이 행복이 사라질까 두렵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무상의 맛 또한 무척이나 감칠맛이 납니다. 뭐랄까, 후회 없는 하루를 보내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는 노을을 감상하는 기분? 다만 그 순간을 온전하게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행복은 붙잡으려 하면 달아나 버리는 파랑새와도 같습니다. 살아 있는 우리들이 무상을 느끼는 시간은 곧 죽음을 자각하는 순간입니다. 찾아오는 죽음을 억지로 밀어내는 것도 부질없지만, 아직 오지도 않은 죽음을 애써 붙잡으려 허우적대는 것 역시 허망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아름답고 평화롭고 고요한 죽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내가 경험한 죽음의 문턱은 생각과 달리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볼품없었습니다. 대신 무척 고통스러웠습니다. 안쓰러울 정도로 욕망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설령 죽음의 본질이 그러할지라도 죽음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담담한 마음을 키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내 곁을 떠날지라도 죽음만은 항상 나와 함께 하는 친구이니까요.
왜 인도 사람들은 윤회를 생각했을까요? 그동안 너무나 당연한 전제라 딱히 의문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 그리고 윤회 같은 것들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매우 새롭게 다가오는 가을날의 차가운 새벽입니다. 이 새벽에 잔잔한 피아노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의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지켜봅니다. 그리고 감칠맛 나는 무상의 맛과 무색무취한 죽음을 생각합니다. 이 또한 큰 행운이자 행복입니다.
“Viva la Vida”(인생이여 만세). 이 가을에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우리 모두의 화양연화입니다. 오늘 아침은 콜드 플레이의 ‘Viva la Vida’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행복은 붙잡으려 하면 달아나 버리는 파랑새와도 같습니다. 살아 있는 우리들이 무상을 느끼는 시간은 곧 죽음을 자각하는 순간입니다. 찾아오는 죽음을 억지로 밀어내는 것도 부질없지만, 아직 오지도 않은 죽음을 애써 붙잡으려 허우적대는 것 역시 허망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아름답고 평화롭고 고요한 죽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내가 경험한 죽음의 문턱은 생각과 달리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볼품없었습니다. 대신 무척 고통스러웠습니다. 안쓰러울 정도로 욕망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설령 죽음의 본질이 그러할지라도 죽음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담담한 마음을 키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내 곁을 떠날지라도 죽음만은 항상 나와 함께 하는 친구이니까요.
왜 인도 사람들은 윤회를 생각했을까요? 그동안 너무나 당연한 전제라 딱히 의문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 그리고 윤회 같은 것들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매우 새롭게 다가오는 가을날의 차가운 새벽입니다. 이 새벽에 잔잔한 피아노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의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지켜봅니다. 그리고 감칠맛 나는 무상의 맛과 무색무취한 죽음을 생각합니다. 이 또한 큰 행운이자 행복입니다.
“Viva la Vida”(인생이여 만세). 이 가을에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우리 모두의 화양연화입니다. 오늘 아침은 콜드 플레이의 ‘Viva la Vida’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