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슬픔
2020년 01월 29일(수) 00:00

고 성 혁 시인

아픈 사람에게 더 이상 해볼 방법이 없는 것, 늙은 사람에게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다. 이런 일에 어떻게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안톤 슈낙-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5년 전 마을에 들어와 영감님을 처음 뵀다. 인사차 동네분들께 이름이 적힌 수건을 한 장씩 드렸는데 영감님은 그 후 나를 보실 때마다 ‘고씨!’라고 부르셨다. 고씨! 그 호칭이 익숙해질 무렵 내 집 앞까지 산책하신 영감님은 꿀벌을 치라고 말씀하셨다. 영감님은 전국을 누비며 양봉을 하신 분이었다. “산자락 밑이니 벌을 치란 말이야. 밤 꿀이 얼마나 좋은데 빌빌거리고 있느냐 말야.” 그분의 나이 86세이실 때 일이다. 그건 내가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영감님은 “젊은 친구가 기백이 없어”라며 쯧쯧 혀를 차시곤 지팡이를 짚은 채 기우뚱, 돌아서셨다.

영감님은 노환으로 몸이 불편함에도 늘 마을을 돌며 동네분들에게 농담을 건네셨는데 그 댁 할머니는 그런 영감님이 말실수라도 할까봐 귀를 세우고 노심초사하셨다. 물가에 놓인 어린아이처럼 끊임없이 눈으로 영감님을 좇는 할머니의 모습은 아름다운 수채화 같았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며칠간의 여행 후 동네를 들어서는데 길가에 영감님이 서 계셨다. 지팡이에 기댄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왜 그러고 계시냐고 여쭸더니 “망구가 병원에 입원했어…”라고 중얼거리셨다. 말끝에 울음이 묻어났다. “곧 나으시겠지요.” 손을 잡고 있다 피치 못해 돌아서는데 구부리고 주저앉으셨다. 눈에 밟히던 그 광경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다.

며칠이 지난 뒤 마을길을 내려가다 완연하게 수척해진 영감님을 다시 뵀다. 담벼락에 기대 먼 하늘을 보고 계셨다. 도드라지게 는 주름살과 움푹 들어간 눈. 나를 보시더니 거친 숨소리로 말씀하셨다. “망구가 아주 가부렀어….” 머릿속이 하얘졌다. 가슴이 너무 아파 영감님의 쪼그라진 손을 잡았다. 영감님은 결국 황소가 우는 것처럼 통곡하셨고 나도 노인의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변비 때문에 수술을 하셨고 그 수술이 잘못 돼 돌아가시다니. 너무나 황당한 일이었다.

얼마나 당혹스러우셨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 언제고 그 경계를 허물며 우리를 넘보는 저승사자와 이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우리의 운명. 뼈를 때리는 삶의 한계를 절감했다. 해거름 두 노인네의 두런거리던 말소리가 고샅을 타고 오르는 낙엽처럼 떠올랐다. 이제 서로의 손을 의지하며 걷던 모습은 재현할 수 없는 과거가 되고 말았다. 두 노인이 함께 살아온 오랜 세월을 가늠하니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어찌해야 할까. 빨간 눈으로 숨을 멎고 우시는 영감님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그 자리를 떠났는지 모르겠다.

이장님을 뵙고 영감님의 요 며칠 근황을 물었다. 장례를 마친 자제들은 떠나고 며느님이 댁에서 며칠째 영감님을 구완하면서 마지막 살림 정리를 하고 계신 듯하다고 말했다. 다음 날 일부러 찾아 뵀다. 담벼락 옆에 쪼그리고 앉아 계셨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말씀하셨다. “고씨, 화분이라도 하나 갖고 가.” 다시 간절한 슬픔이 몰려왔다. 우리 두 사람은 길가에 앉아 또 울었다. 영감님이 흐느끼다가 작게 속삭이셨다. 망구탱이…. 이놈의 할망구… 나를 두고 가다니…. 이 그리움을 어찌 할까. 그 말씀을 억누르고 있는데 영감님이 불쑥 말씀하셨다. “나 모레 요양병원으로 들어가.”

어떤 위로도 사치였다. 어떤 말도 영감님의 가슴을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요양병원이라니. 영영 마을로 돌아오지 못할 영감님. 우리는 이제 자신의 집에서, 자신이 생활했던 방식대로 살다가 갈 수는 없게 된 것인가. 피치 못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이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며칠 지나 병원에 계신 영감님을 찾아 뵀다. 나를 보자마자 흐릿하게 눈가를 적셨다. 괴괴한 냄새가 나는 병실과 그 안에 그림자처럼 앉아 계시는 노인네들의 모습. 사는 일이라는 게 너무 하찮고, 세상이라는 것도 바람에 날리는 휴지 조각 같았다. 아, 영감님. 명절은 잘 보내셨을까. 안타깝다. 참으로 외로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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