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1200년 전 시대를 앞서간 장보고, 해상무역 왕국을 건설하다
2019년 06월 11일(화) 04:50 가가
<제2부> 전라도, 시대정신을 이끌다 ④한류 원조-<하>글로벌 CEO 해상왕 장보고
도자기술·불교 들여온 예술가이자 종교개혁가
극심한 궁핍에 당으로 건너가 장교로 근무
완도 청해진 설치 노예무역 근절·해상교역
中 산둥성 법화원, 장보고 직접 건립 사찰
재당 신라인 결집… 동아시아 불교발전 성지
도자기술·불교 들여온 예술가이자 종교개혁가
극심한 궁핍에 당으로 건너가 장교로 근무
완도 청해진 설치 노예무역 근절·해상교역
中 산둥성 법화원, 장보고 직접 건립 사찰
재당 신라인 결집… 동아시아 불교발전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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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는 시대를 앞서 간 벤처 원조다. 1200년 전 이미 한류를 인식했다. 해도(海圖)도 나침판도 없던 시대에 한·중·일 동북아를 하나로 묶어 무역을 한 ‘글로벌 CEO’다. 그는 또 상인이었지만 단순히 도자기를 팔아 넘기는 상인이 아니라 아예 도자기술을 우리나라에 들여올 줄 알았던 예술인이었고, 평등사상의 불교 선종을 들여온 종교개혁가이기도 했다.
장보고와 동 시대를 살았던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그의 저서 ‘번천문집(樊川文集)’에서 “인의지심이 충만하고 명견을 가진 인물”이라고 장보고를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나라에 한 사람이 있으면 그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라는 잠언을 인용하면서 “장보고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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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청해진 대사가 설립한 츠산 법화원.(위) 일본 교토 히에이산 엔랴쿠지(延曆寺)에서도 장보고 대사의 흔적(청해진대사장보고비)을 만날 수 있다. /일본 교토=최현배 기자 choi@ |
지난 4월 23일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 츠산(赤山) 법화원. 장보고의 자취가 서린 법화원은 신비로웠다. ‘해신’의 조화일까. 잔뜩 찌푸린 하늘에 바람에 실린 빗줄기가 거세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했다. 법화원은 비구름의 강약에 따라 숨었다 드러났다를 되풀이했다.
이 곳은 장보고에 의해 건립된 사찰로, 재당 신라인들을 하나로 결집시킨 당시 신라원 중 규모가 가장 큰 불교사찰이었다. 동아시아 불교 교류의 장이자, 동아시아 불교 발전의 성지였다.
당나라 무종때 불교 탄압으로 인해 절이 사라졌다가 1989년 엔닌의 기록에 근거해 복원됐다. 엔닌은 법화원만 아니라 당시 당나라에 있던 신라방, 신라원, 구당신라소 및 장보고를 비롯한 재당 신라인들의 활동상 등을 전해줬다.
법화원 맞은편에는 ‘장보고전기관(張保皐傳記館)’이 마련돼 있다. 2007년 4월 중국 적산그룹유한회사가 5개 전시실로 꾸민 곳이다.
입구에는 커다란 부조상이 웅장했다. 가운데 턱하니 장군이 칼을 짚고 앉아 있다. 장군이자 무역상으로서 그의 업적을 조각해 놓았다. 조각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은 좌우에 대련(對聯·양쪽에 거는 대구)으로 처리했다. ‘적산포의 신이 도와 온 세상에 복을 주고, 대사는 동아시아 삼국을 이어주며 교역했네’(明神福佑四海 大使締交三邦·명신복우사해 대사체교삼방)
부조상 앞에는 ‘정(鼎)’이 놓여 있다. ‘법화원의 보정’이다. 고대시대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세발 달린 그릇이다.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가 증정한 것이다.
안으로 한 발 짝 들어서니 빗속에 우뚝 선 장보고 장군이 기다렸다는 듯 내려다본다. 전기관은 총 5개로 구성됐다. 장보고의 일생을 그림과 역사서, 유물 등으로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중국 정부가 공식으로 인정한 흔치 않은 외국인 기념관이다. 중국 정부는 왜 장보고전기관을 허락한 걸까? 이 곳 법화원이 고대 동아시아 해상교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는 중국이 추진하는 해상실크로드와 부합된다.
장보고의 흔적은 일본 교토에서도 만날 수 있다. 천태종 본산인 교토 히에이산 엔랴쿠지(延曆寺)에서다.
그 곳에는 ‘청해진대사장보고비’가 있다. 엔랴쿠지는 그를 흠모한 엔닌이 출가한 절이다. 일본 3대 사찰의 하나이며,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명찰이다. 엔닌은 ‘입당 구법’할 때 적산 법화원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재당 신라인들의 지원을 받았던 것을 기려 엔랴쿠지 별원으로 세키잔젠인(赤山禪院)을 건립했다. 그 연유로 이 곳에 2001년 12월 완도군이 기념비를 설립한 것이다.
◇장보고는 왜 당나라에 갔을까
장보고가 활약한 9세기 통일신라는 골품제 사회였다. 출세와 신분 상승에 제약이 있었다. 설상가상, 재해와 기근으로 농민층은 피폐했고 도적떼는 횡행했다. 신라에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이들은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이야 ‘코리안드림’을 실현하려 한국으로 몰려들지만, 당시에는 ‘차이나드림’을 꿈꾸며 세계의 중심, 당나라로 향했다.
젊은 장보고도 그러했다. 정년이란 친구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군인으로 성공한다. 30대 나이에 쉬저우(徐州) 무령군 소장의 지위까지 오른다. 신라인으로, 그것도 한미한 평민 신분의 30대 젊은이가 크게 성공한 셈이다.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았다. 당나라는 아라비아·페르시아·신라·일본의 상인들과 교역하고 있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호연지기를 가르친 바다는 모든 것을 실어나르는 고속도로였다. 그리고 국운이 쇠약해져가는 신라 백성들의 고달픈 삶이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라가 보살피지 않으니 기근이 들면 백성들은 식량을 구걸하기 위해 중국땅으로 몰려다녔다. 게다가 바다에 출몰하는 해적들은 신라인들을 손쉽게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먹었다.
그는 외국 군대에서 출세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의 가슴이 너무 뜨거웠다.
장보고는 828년(흥덕왕 3년) 신라로 돌아와 왕에게 “중국 어디를 가보나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청해에 진을 설치해 해적들이 사람을 잡아서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십시오”라며 해적 소탕을 자청했다.
왕은 군사 1만으로 청해진 설치를 허락하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했다. 장보고는 완도의 청해진에 본부를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 황해에서 자행하던 노예무역을 근절시켰다. 더 나아가 바다를 안정시키고, 당과 일본에 진출해있던 신라인들과 손잡아 삼국무역을 추진, 해상왕국을 건설해 간다.
청해진은 삼국무역의 중심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 국제적 영향력을 획득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활발한 해상 활동을 벌인 시기였다. 그 중심에 장보고가 있었다.
◇청해진을 동아시아 중심 무대로
청해진 해상왕국은 신라사회와는 달랐다. 문화의 다양성이 허용됐으며 개방적이고 능력 중심의 조직이었다. 장보고는 청해진대사에 임명돼 기존 신라 관직체계에는 편입되지 않으면서도 특별한 위치로 대접받았다.
청해진에 참여한 사람들은 골품체제가 유지되는 신라사회 주변에 위치했으며, 당에서도 이방인으로 여의치 못해 부랑하던 다수의 능력있는 사람들이 귀국, 합류했다. 장보고와 막료들이 이룩한 계층구조는 신라사회가 안고 있는 골품제의 한계에서 벗어나 진일보한 것으로 새로운 사회의 출현을 준비한 것이었다.
또 경주 중심에서 벗어나 청해진을 비롯한 서남해안을 동아시아 역사 무대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한국사 발전 과정에서 특별한 경우에 해당된다. 동시에 고대사회 해체와 중세사회를 향한 나말여초 전환기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청해진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중국의 사상과 문화, 물류를 받아들였다. 훗날 고려청자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장보고가 당시 중국 월주 도자기 기술을 강진으로 들여온 덕분이다.
불교 개혁에도 선구적 역할을 했다. 당시 불교가 귀족 중시의 호국불교였는데, ‘일체 만물에 불성이 있다’는 평등사상의 선종을 그가 들여왔다. 그 토대 위에서 영암의 도선국사가 신라와 경주로 대표되는 고대체제를 무너뜨리는 새로운 사상적 구조를 만들게 됐고, 경주 중심의 지리결정구조를 깨트리게 됐다. 그리고 도선이 열어놓은 길로 견훤이 등장하면서 경주와 신라는 무너지고, 후삼국이 등장했으며 고려로 이어져 중세사회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다.
/웨이하이·교토=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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