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만세현장을 가다] <3> 함평
“우리 강토 우리 손으로 찾자” … 100년전 외침 아직도 ‘쟁쟁’
청년 중심 문장면민들 만세운동 주도
1919년 4월 거사…영광·무안 급속 확산
경찰 유혈진압에 해산…24명 옥고
1년뒤 1920년 1주년 기념 만세시위
대표적 독립운동가 김철 선생
여운형·김구 선생과 일평생 독립운동
2019년 02월 19일(화) 00:00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난 일강 김철 선생 생가터에 지어진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역사관’.

함평군은 영광군·무안군·나주시 등과 인접한 전남 서부권의 교통 요충지다. 100년 전 광주에서 발발한 만세시위는 함평을 거쳐 전남 서부로 퍼져 나갔다.

함평의 만세 시위 양상 또한 다른 지역과 비슷하게 장터를 중심으로 청년층이 주도했다. 이는 천도교나 기독교세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한데다 한말 의병봉기로 유생·유림층이 궤멸한 상태로 만세운동을 이끌어나갈 조직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평 군민들은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고 대규모 만세시위를 성사시켰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1주년 시위도 치른다. 시위자들이 일제 경찰에 붙잡혀도 끝까지 동료나 주동자를 실토하지 않은 근성으로 동력을 상실하지 않은 결과다.

◇읍내시위 좌절, 그리고 대규모 운동 벌인 문장면민들=한말 의병으로 활동한 정윤면의 손자 정기연(당시 18세)은 할아버지를 사살한 일제에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1919년 2월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들은 정기연은 이인행·윤백언과 함께 상경해 3월1일 탑골공원에서 시위에 참여했다가 곧 경찰에 붙잡힌다. 3일간 문초를 받고 풀려난 정기연과 이인행은 친구집에서 치료를 받던 중 우연히 장성 출신 의병 기산도를 만난다. 이들은 기산도를 따라 인천 월미도로 가 항일투사들을 만났고 독립사상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국민대회 취지문을 작성하는데 참여한다.

취지문은 ‘슬프도다 우리 민족들. 4000년 역사를 가진 나라로서 어찌해 왜적 일본에게 국토를 빼앗길 수 있으랴. 우리 힘으로 강토를 찾아보자’라는 비장한 어조가 담겼다.

정기연과 이인행은 이 취지문을 가지고 함평 시위 책임자가 돼 3월15일 귀향한다. 이들은 조사현(당시 25세), 김용언, 김준령, 모순기, 김준부, 김기성 등과 모임을 갖고 4월26일에 시위를 시작하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전단을 돌리던 김준부·김기성이 4월18일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한다. 이 둘은 끝까지 동지들을 발설하지 않았지만 4월26일 읍내 시위계획은 무산됐다.

앞서 이인행은 김기택 등 문장면민들을 만나 만세시위를 논의하며 긴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은 함평군 월야면 월계리의 한문서당인 ‘낙영재’에서 문장장터가 열리는 4월8일 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 1600장, 격문 등을 제작했다.

거사 당일 이인행, 김기택, 정용섭, 정재남 등은 낙영재 앞 바위에 올라 격문을 읊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기택은 태극기를 들고 4㎞ 떨어진 문장장터로 걸어갔다. 장터에 가까워질수록 인파는 수백명까지 불어났다. 시위대는 문장리에 있던 헌병분소를 기습한 후 함평·영광·광주 송정리 방면으로 진출한다. 일본 경찰은 총검으로 대오를 해산시키며 김기택을 검거했다. 인근에서 다리 공사를 하던 일본인 노동자 10여명도 쇠망치를 휘두르며 거리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일부 면민들은 죽창으로 대항하며 시위 열기는 과열됐고 밤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경찰이 영광·장성·나주에서 진압해오자 시위대가 밀리며 끝내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인행·이윤상·김기택·장효섭·정재남 등 시위 주동자 24명은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당해야 했다.

3·1운동 1주년을 갓 넘긴 1920년 3월26일 조사현은 1주년을 기념하고자 함평공립보통학교 졸업식이 끝나는 대로 학생 10명과 태극기를 제작해 함평장터에서 다시 만세를 불렀다. 1920년 4월1일과 2일에는 각각 학교면과 나산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산상봉화와 함께 함평 전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때의 시위로 조사현 등 20여 명이 붙잡혔다.

조사현은 법정에서 “1919년 3월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함평지역만 빠지면 치욕이어서 학생들과 나섰다”고 발언했다. 공판 기록이 남아있는 11명 중 조사현은 징역 1년 6개월을 받아 가장 많은 형량을 선고받고 복역했지만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인행·김기택 등이 문장만세운동 거사를 모의한 한문서당 ‘낙영재’. 지난 2005년 복원됐다.


◇이역만리에 묻힌 함평 출신 독립운동가 김철=함평의 독립운동사를 논할 때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신광면 출신 일강 김철(1886~1934)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김철 선생의 생가터에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재연한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 역사관’이 세워져 있다. 지난 2009년 세워진 이곳은 회의실과 주방, 집무실, 숙소 등 내부 공간과 책상, 침대 등 중국 현지에서 제작한 소품을 통해 100년 전 임시정부의 모습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역사관 옆에는 김철 선생의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는 ‘김철기념관’과 사당도 자리하고 있다. 또한 청사 뒤편에는 단심송(丹心松)이 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나무는 수시로 일제 헌병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김철 선생의 부인이 남편에게 누가 될까봐 목을 매 자결한 곳이다.

1886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철(본명 김영탁)은 29세때 일본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한 후, 독립운동을 하고자 이름을 바꾸고 상하이로 망명한다. 여운형을 만나 임시정부의 기반이 된 신한청년당을 결성한다. 1919년 1월 김철은 고향을 들러 가산을 모두 정리해 독립운동 자금을 만든다. 3월 즈음에는 광주에 머물며 최흥종 목사 등과 함께 광주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같은 해 4월에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이듬해 1월에는 김구 선생과 의용단을 조직했다. 1934년 1월 임시정부 초대 재무장으로 선임된 그는 군자금 모금을 담당했다. 투쟁이 이어지면서 일제의 추적도 강화됐고, 김철은 건강이 악화돼 1934년 6월 중국 항저우에서 48세의 나이로 타계한다.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없었던 임시정부는 항저우 악비묘 뒷산 공동묘지에 유해를 안치했다. 이후 후손들은 국내로 이장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무산됐다.

김철의 손자 김만선(69)씨는 “수차례 중국에서 할아버지의 묘지를 찾으려고 시도했지만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모해 결국 흙 한줌만 가지고 왔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많은 분들이 함평의 독립운동과 할아버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찾아주시니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용희·정병호 기자 kimyh@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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