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하는 용기에 대하여
2018년 11월 26일(월) 00:00 가가
말과 문자는 쓰는 사람이 없으면 점차 사라지는 것이다. ‘환대’라는 단어도 쓰임새가 줄어드는 단어 중 하나다. 그 이유는 ‘나’와 ‘너’의 사이가 그만큼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환대는 어렵게 찾아온 낯선 사람을 내쫓지 않고 반갑고 따뜻하게 대접하는 것이다. 이러한 환대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오디세이아’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인류 최고의 고전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오디세이아’는 BC 750년경에 호메로스가 쓴 서사시다. 유명한 트로이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10여 년 동안 겪는 길고 험난한 여정을 그린 이야기다. 오랫동안 오디세우스를 붙잡고 놔 주지 않던 아름다운 님프 칼립소는 아무리 해도 오디세우스를 막을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이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먼 길을 가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꼼꼼히 챙겨 주기까지 한다. 이왕에 떠나야 할 사람이라면 잘 보내고 싶은 것이다.
고향을 찾아가는 길에 오디세우스는 어딘지 알 수 없는 낯선 곳에 이르자 불안해진다. 오디세우스는 불안을 토하듯이 혼잣말을 한다. “나는 또 어떤 인간들의 나라에 온 걸까? 그들은 오만하고 야만스럽고 옳지 못한 자들일까, 아니면 나그네들에게 친절하고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씨를 가진 자들일까?”
이런 오디세우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모르는 것보다 더 불안한 일은 없다. 낯선 곳에 대한 불안은 공간적으로 익숙하지 않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생명이 위험하게 될 수도 있는 극단적 상황에 대한 감정이다. 게다가 오디세우스처럼 도움을 청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불안은 더 커진다. 낯선 사람에게 드러내는 야만성과 오만은 그 낯설음이 불편할 때 흔히 발생하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가 말하는 ‘야만’이란 다르거나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드러내는 타인에 대한 폭력성이다. ‘나그네에게 친절한 환대’를 하지 않는 것이 야만이라는 의미는 낯선 사람이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낯선 사람이란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낯선 사람은 전에 본 적이 없다거나 관계가 없는 사람만을 말하지 않는다. 서로의 생각과 배경이 다르거나, 언어가 다르거나 지향하는 길이 다르거나 또는 그저 피부색이 다르고 사는 방식이 다른 모든 사람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낯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 스스로가 누군가의 ‘낯선 사람’이면서도 항상 다른 사람이 낯설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한다. 이런 야만성은 키클롭스라고 하는 외눈박이 괴물에게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 괴물은 자신에게 찾아온 손님을 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잡아먹는다. 이 괴물이 찾아오는 사람을 잡아먹는 것과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은 같은 의미다. 한쪽 눈으로만 보는 태도가 바로 식인성의 야만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떤 조건과 신분과 위치를 따지지 않고 누구나 환대하는 사람이 나우시카 공주다. 불안한 오디세우스에게 나우시카 공주는 “이제 그대는 우리 도시와 나라에 왔으니 옷은 물론이고 불운한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도움이라면 무엇이든지 당연히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왕인 아버지에게 안내한다. 나우시카의 아버지는 더 극진한 대접을 하며 주저 없이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준비해 준다. 이 환대의 나라에서 낯선 사람은 신이 보낸 선물이기 때문이다.
왕은 자신에게 보내진 ‘귀한 선물’을 극진하게 환대하며 ‘즐겁게 빨리 고향 땅에 닿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물론 이것저것을 따지면서 조건을 걸지도 않는다. 환대하는 마음은 야만을 극복하는 인간성의 발현이며 한 눈으로만 세상을 단정하지 않으려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야만이 단순히 본능에 따르는 동물적인 모습의 표식이라면 환대는 인간성의 증표이며 야만을 이겨 내고 윤리적인 인간다움을 실천하는 용기다.
우리는 서로에게 있어서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언어를 쓰는 낯선 존재다. 이 낯설음에 대한 외눈박이의 태도가 바로 우리 안의 야만성임을 깨달을 때,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다. 누구나 처음에는 서로에게 낯선 존재가 아니던가.
오디세우스가 말하는 ‘야만’이란 다르거나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드러내는 타인에 대한 폭력성이다. ‘나그네에게 친절한 환대’를 하지 않는 것이 야만이라는 의미는 낯선 사람이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낯선 사람이란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낯선 사람은 전에 본 적이 없다거나 관계가 없는 사람만을 말하지 않는다. 서로의 생각과 배경이 다르거나, 언어가 다르거나 지향하는 길이 다르거나 또는 그저 피부색이 다르고 사는 방식이 다른 모든 사람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낯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 스스로가 누군가의 ‘낯선 사람’이면서도 항상 다른 사람이 낯설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한다. 이런 야만성은 키클롭스라고 하는 외눈박이 괴물에게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 괴물은 자신에게 찾아온 손님을 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잡아먹는다. 이 괴물이 찾아오는 사람을 잡아먹는 것과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은 같은 의미다. 한쪽 눈으로만 보는 태도가 바로 식인성의 야만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떤 조건과 신분과 위치를 따지지 않고 누구나 환대하는 사람이 나우시카 공주다. 불안한 오디세우스에게 나우시카 공주는 “이제 그대는 우리 도시와 나라에 왔으니 옷은 물론이고 불운한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도움이라면 무엇이든지 당연히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왕인 아버지에게 안내한다. 나우시카의 아버지는 더 극진한 대접을 하며 주저 없이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준비해 준다. 이 환대의 나라에서 낯선 사람은 신이 보낸 선물이기 때문이다.
왕은 자신에게 보내진 ‘귀한 선물’을 극진하게 환대하며 ‘즐겁게 빨리 고향 땅에 닿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물론 이것저것을 따지면서 조건을 걸지도 않는다. 환대하는 마음은 야만을 극복하는 인간성의 발현이며 한 눈으로만 세상을 단정하지 않으려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야만이 단순히 본능에 따르는 동물적인 모습의 표식이라면 환대는 인간성의 증표이며 야만을 이겨 내고 윤리적인 인간다움을 실천하는 용기다.
우리는 서로에게 있어서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언어를 쓰는 낯선 존재다. 이 낯설음에 대한 외눈박이의 태도가 바로 우리 안의 야만성임을 깨달을 때,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다. 누구나 처음에는 서로에게 낯선 존재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