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남지] 제6부-사상·종교의 산실 호남 (1) 한말 의병 이끈 당대 최고의 학문 ‘노사학(蘆沙學)
학문에 충실하고 국가 위기땐 칼을 들어라
2017년 07월 04일(화) 00:00

장성 고산서원(高山書院)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 1878년 정사(精舍)를 지어 담대헌(澹對軒)이라 이름짓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후손들이 1924년에 중건한 후 1927년에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 편액을 걸었다. 전남도 기념물 63호다.

호남 유학사 중에 독창적인 학설을 수립하고 오랫동안 강학 활동에 힘써 가장 많은 문인을 배출한 인물로는 단연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1798∼1879) 선생을 손꼽는다. 노사 선생은 조선후기 내내 논란이 되었던 인물성동이론을 이일분수(理一分殊) 철학 체계로 일거에 해결해 조선조 6대 성리학자로 받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에 서구 제국주의 침략이 잇따르자 위정척사운동을 전개, 프랑스 침략을 막아냈다. 이런 노사 선생의 학문과 정신은 그의 문인들에게도 이어졌다. 노사 선생의 문인들은 직전, 재전을 포함하여 4000여 명을 상회한다. 문인들 역시 기정진의 주리철학과 위정척사사상을 계승해 한말 일제 침략 속에서 호남 지역 의병운동을 주도, 다른 지역의 모범이 됐다.

노사 선생은 전북 순창 복흥에서 태어났으나, 양친이 세상을 떠난 18세 이후에는 장성에 줄곧 거주했다. 그는 늘 곤궁해 여러 번 이사를 다녔는데, 결코 자신의 운명에 굴하지 않고 학문에 힘써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그 중 청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낸 문제를 푼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서울 사람들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기정진이 홀로 해결하자 당시 국왕은 “서울의 수많은 사람들의 안목이 장성에 사는 외눈보다 못하다.(長安萬目不如 長城一目)”는 평가를 했고 이후 장성을 ‘선비의 고장’ 또는 ‘문향골’로 부르게 된 계기가 됐다.

이처럼 인생과 천리에 깊이 통찰했던 노사 선생은 46세 되던 1844년 여름 장성 남암(南庵)에 피서하면서 ‘납량사의(納凉私議)’를 짓고 난 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아내가 남편의 지위를 빼앗고, 신하가 임금의 지위를 빼앗으며, 오랑캐가 중화(中華)의 지위를 빼앗는 세 가지는 천하의 대변이다. 그런데 기(氣)가 理의 지위를 빼앗는다면 저 세 가지 변괴는 곧 차제로 올 일이다.(妻奪夫位 臣奪君位 夷奪華位 若氣奪理位 則彼三變者 卽次第事耳)”

이것은 기(氣)를 중시하고 리(理)를 천시하면 국가 간이나 군신, 가족 간에 중대한 변괴가 발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기정진은 기호학계의 호론과 낙론이 모두 리(理)의 분수를 기(氣)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고 파악했다. 이에 천명과 성의 분열이 일어나고, 학계와 사회의 분열과 혼란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노사 선생은 리일(理一)에 이미 분수(分殊)가 내재돼 있다고 보아야 천명이 주재하며 리가 기를 주재하게 된다고 했다.

노사선생은 1862년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광범위한 조세부정에 항거해 곳곳에 민란이 일어나자 ‘임술의책(壬戌擬策)’을 지어 지배층의 잘못을 질타했다. 선생은 예의염치를 지켜야 할 사대부들이 이익을 다투는 마음 때문에 곳곳에 부정이 일어난다고 파악하고 공공(公共)에 바탕을 둔 사회·정치질서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는 양반 등의 특권층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서원의 남발과 과거제도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천하 사람들을 위한 공공의 정책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개혁론은 고창의 안중섭이나 강인회, 정하원, 장성 기양연, 담양 이최선 등 문인들에게 계승됐고 그들은 사대부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습속을 바꾸고 삼정의 제도적인 측면이나 토지소유의 불균등을 해소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후일 1894년 고창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사회경제적 개혁의 기본 토대가 됐다.

그는 또한 프랑스군이 쳐들어오자 조정에 6조에 달하는 내수외양책(內修外攘策)을 주장, 인심을 결집시켜 프랑스군의 침략을 막아냈다. 이 6조는 제국주의의 침략적 속성을 깊이 파악한 명문으로서, 언로와 인재 등용, 신분에 관계없는 군사훈련을 통한 내수책과 외적을 요격하자는 전략을 마련한 외양책으로서 당시 가장 적절한 외적 방어책이기도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기정진에게 공조참판·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을 제수하여 깊이 감사를 표했다. 실로 기정진의 방책은 당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노사 선생의 내수외양책은 조선조 말 의병운동으로 계승됐다. 노사 선생의 손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은 1896년 장성과 나주 일대의 향촌군사력을 모아 일제에 대항했고, 노사선 생의 문인이었던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과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 역시 1896년 의병운동에 이어, 1907년에는 일제의 지형적 이점과 군사력 강화를 통해 일제와 맞섰다. 특히 기삼연의 전략은 향촌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재정과 군사력을 마련하고 유리한 지형조건을 이용하여 적을 격파한다는 것으로서 기정진이 마련한 방어 전략을 계승한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로도 노사 선생의 문인과 후학들은 노사 선생의 주리철학과 위정척사 사상을 계승, 인의도덕에 기반한 유학을 숭상하고 개인주의에 기초한 서구적 가치에 반발하여 공동체와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리를 강조했다. 이러한 노사 선생의 학문과 문인들의 활동은 오늘날까지도 영, 호남지역에 강인하게 계승돼 꿋꿋히 의리를 지키고 국가와 민족에 대한 도리를 다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사와 그의 문인들에 관한 연구는 현재 어떠한가. 나란히 조선조 6대 성리학자로 평가받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1978년부터 사단법인 퇴계학연구원이 설립돼 매년 4차례씩 퇴계학보를 간행하고 있고, 영남 지역에는 영남퇴계학연구원, 퇴계학연구소가 설립돼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 일본이나 대만, 미국, 독일에 각각 퇴계연구소가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경우에도 율곡연구원이 설립돼 매년 2차례씩 율곡학보를 간행, 현재 34집에 이르고 있으며, 율곡교육원을 만들어 율곡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이에 비해 노사 선생의 경우는 대학이나 사회에 기초 연구기관이 전무하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10대 문장으로 유명한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선생은 노사 선생의 학설을 중국이나 조선에서 그 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학설이라고 했다.

퇴계 선생이나 율곡 선생이 훌륭하지만, 노사 선생과 그의 문인들의 활동도 그 못지 않은 것이다. 서둘러 노사학연구원이 수립돼 체계적이고 심도 깊은 연구가 진행되길 기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김봉곤 원광대 연구교수

-국사편찬위원회 박사급 연구원 역임

-순천대 지리산권문화연구원 HK 연구교수 역임

-고산서원 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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