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호남지-선사와 고고]<4>고고학으로 새로쓰는 호남의 마한역사
2017년 03월 07일(화) 00:00
백제·신라와 견줄 마한문화, 찬란한 부활 꿈꾼다

나주 반남고군분.

고인돌 왕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던 청동기시대의 호남지역은 기원전 2세기경부터 큰 하천 지대를 중심으로 마한 소국들이 형성되어 나가다가 기원전후께부터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기후 악화로 인한 농업 생산력의 감소 때문으로 추정된다. 농업공동체의 산물이었던 고인돌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200여년이 지나가고 3세기초부터 온화한 환경이 찾아오면서 새로운 발전이 시작되었다. 3세기 후엽의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50여개의 마한 소국 가운데 거의 반수에 달하는 소국들이 호남지역에 있었다. 전북지역 10개국, 전남지역 15개국 정도였다.

문헌 기록과 고고학 자료를 보면 각 소국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하면서 외교 분 야 정도에서 권역별로 느슨한 협력 체제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의 모든 세력들이 그와 같았다면 마한 소국들의 공존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강유역에서 출범한 백제는 평화로운 마한 소국들을 그대로 남겨 두지 않았다. 온조로 대표되는 백제 건국 세력은 발전된 고구려의 국가 체제와 전쟁의 효력을 잘 알고 있었다. 고구려와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몸집을 키워야 했던 백제는 마한 소국들을 하나하나 병합해 나갔다.

현행 교과서를 보면 호남지역 마한 소국들은 4세기 중엽 근초고왕에 의해 일시에 병합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60여년전에 발표되었던 이병도 선생의 견해에 따른 것이다. 고고학 조사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6세기초까지 나주를 중심으로 마지막 마한 사회가 발전하였음을 병기하였던 10여년전의 교과서와는 차이가 있다. 입증해 주는 문헌기록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러나 관련된 문헌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중국 ‘양직공도’에는 521년경 양나라에 파견되었던 백제 사신이 전하였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주변의 여러 나라에 대해 백제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내용이다.

그 가운데에는 마지막 마한에 해당하는 나라들이 여럿 보인다. 고고학 조사 연구 성과와 일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식 역사서가 아니라 백제사신 그림 곁에 쓰여 있는 글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 마한은 전북 고창지역을 포함한 전남지역에 해당하며 ‘양직공도’의 521년에서 사비 천도가 이루어진 538년 사이에 병합되었다. 이는 교과서에 마지막 마한 소국들이 백제에 병합된 시기를 4세기중엽에서 6세기중엽으로 바꾸어 쓰는 정도에서 끝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 사이에 해당하는 150여년 동안 일어났던 모든 역사를 다시 평가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대표적인 예로 왕인박사를 들 수 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왕인박사는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함으로써 아스카문화를 꽃피우게 한 역사적 인물이다. 왕인박사는 백제에서 파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내에는 관련 기록이 없고 영암 월출산 자락의 성기동에 설화와 지명이 남아있을 뿐이다.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감안하면 405년에 도일하였다는 왕인박사는 530년경까지 백제와 구분되었던 마지막 마한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장고분 역시 이 지역의 역사를 말없이 웅변해 주고 있다. 일본 야마토 세력의 전방후원분과 상통하는 장고분들은 5세기말에서 6세기 중엽 사이의 반세기 남짓한 기간 동안 고창, 영광, 함평, 광주, 담양, 영암, 해남 등 당시의 중심지였던 나주 주변 지대에 15기 정도가 축조되었다.

광주 월계동의 금싸라기땅 4,300평에 자리잡고 있는 장고분에는 일본인들이 자주 찾아온다. 야마토 세력이 마지막 마한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고고학 자료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이 지역 마한 연맹체의 중심이었던 나주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야마토 세력의 역할이 있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나주 주변 지대의 마한 세력들이 야마토의 묘제를 도입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 이유가 분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모든 장고분들이 토착 기반을 찾아볼 수 없는 외딴 지역에 독립분 위주로 산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 보면 야마토에 의해 일본열도가 통합되어 나가던 혼란한 시기에 야마토에 밀린 큐슈 세력들이 야마토 왕권과 이해 관계가 없는 마지막 마한 지역으로 망명하여 남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마한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는 장고분의 분포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주변 지대에 분산 수용함으로써 해결하였다.

마한과 백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죽순과 대나무의 관계와 같이 어디까지 마한이고 어디서부터 백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따로 떼어낼 수 없으면서도 뚜렷하게 구분되기 때문에 그 차이를 인식하고 해석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올해는 마지막 마한의 중심지였던 나주 반남지역의 마한 고분이 처음 발굴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1917년 12월 17일 발굴이 시작되었고 12월 23일에는 마한의 수장을 상징하는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조사와 연구 성과는 이 지역이 백제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마한문화권을 이루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국토개발종합계획과 같은 국가 정책에 반영되어 있는 백제문화권, 신라문화권, 가야문화권 등 대표적인 고대문화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마한문화권이 공식적으로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교과서에도 구체적인 내용이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민들의 역사적 자긍심을 되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 발전에도 활력을 불어 넣는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북 고창지역을 포함하여 모두 15개 정도로 추정되는 마지막 마한 소국들은 몇개의 광역권으로 묶어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권역별 특성을 잘 살려 개발해 나간다면 권역별로 특색있는 자연환경과 함께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접할 수 있는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차제에 마한 사회가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였던 이유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마한 소국들은 혈연을 기반으로한 농업공동체 사회를 이루고 평화롭게 공존하였지만 이는 결국 고대국가 형성의 기반이 되는 비혈연적 사회 조직의 구축을 어렵게 함으로써 고대국가로의 성장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곰곰이 되돌아 볼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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