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호남지 제2부 선사와 고고] 2.동아시아 옥문화를 통해 본 호남
고대 동아시아 관문 호남, ‘국제교류 플랫폼’ 고민할 때다
2017년 02월 14일(화) 00:00

고흥군 야막 고분 유적 출토 유물. 곡옥, 중국제 청동거울, 대도 등이 포함됐다.

여수 남면 안도리에서 발견된 6000년 전의 옥결(옥으로 만들어 허리에 차는 고리)은 어디에서 왔을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요하 지역의 흥륭와(興隆窪) 문화(약8000년 전)로부터 시작돼 서해안을 따라 남하했을까? 아니면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했던 양자강 유역의 하모도(河姆渡) 문화(7000∼5000년 전)에서 왔을까?

신석기 시대 중국 요녕성 흥륭와 문화(약 8000년 전), 길림성 백성(약 7000년 전)과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약 8000년 전), 여수 안도리(약 6000년 전), 일본열도 후쿠이(福井)현(약 6000년 전)등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귀걸이 장식용으로서 발견되고 있으며 이런 요하 지역의 옥 문화는 선사시대와 역사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이 가운데 요하지역의 홍산문화를 비롯한 신석기 시대 옥문화는 황하문명보다 연대적으로 대략 500년에서 1000년 이상 앞서고 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옥기 유물과 더불어 독자적인 성격의 당시 인류 최고 수준의 문명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내몽고 적봉시 우하량에서 홍산문화(약5000년 전)의 옥룡, 옥봉(玉鳳), 옥신인(玉神人) 등이 함께 발굴됨으로써 바로 이곳이 동양사회의 ‘용봉문화’의 시원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80년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홍산문화의 옥룡은 만주와 한반도 일본열도로 건너와 곡옥(曲玉)으로 바뀌어 유행했으며, 후일 모자곡옥(딸린 곱은옥), 금모곡옥(金帽曲玉) 등은 중원문화와는 성격이 서로 다른 독자적인 성격의 옥 문화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들 가운데 우리나라 호남을 중심으로 지석묘, 청동기, 토기 등과 함께 출토되고 있는 옥 유물(옥결, 옥환, 관옥, 옥구슬 등 포함)은 일본 사회의 최고 권력의 상징인 삼종의 신기(곡옥, 청동검, 청동거울)와 거의 같은 구성요소로 되어 있는 관계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홍윤기 교수는 저서 ‘일본 속의 백제, 구다라’에서 삼종의 신기에 대해,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 裕)교수의 “삼신기라는 것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귀화인들의 신보였다고 본다. 옥과 거울과 칼이라는 신보를 천황이 갖춤으로써 비로소 주권의 표상인 삼신기가 성립되었다. 일본 고대왕조는 귀화인들에 의해 성립되었다”라는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삼종의 신기는 흥미롭게도 고조선 건국 과정에 등장하는 천부인(天符印)과 같이 신화적 구성 요소와 방식이 너무도 유사하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고조선의 천부인을 칼, 거울, 방울이라고 하지만, 인(印)의 경우, 고조선의 적통을 이어받은 부여의 ‘예왕지인’(穢王之印)을 놓고 몇 년 전 방영된 TV드라마에서 백제 근초고왕과 고구려 고국원왕이 서로 담판을 벌이던 장면이 떠오른다.

결국 백제와 고구려가 국가의 명운을 다툴 정도로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천부인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일본왕실의 삼종의 신기에 영향을 미쳤을까?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한반도 서남부 즉 호남 지역을 지정학적으로 고려하지 않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사시대의 옥결의 분포지역은 물론 벼농사, 지석묘, 옹관묘, 청동검, 청동거울 등 수없이 많은 고고학적 유적지와 한중일 삼국의 역사적 문헌 기록을 함께 들여다 보더라도 한반도 서남부 호남지역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호남은 일찍부터 동북아 국제 사회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 보성군 득량면 예당리 호동마을 지석묘에서 출토된 곡옥, 관옥, 옥구슬 등 옥 유물과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의 ‘마한인들은 금, 은, 비단보다 구슬을 더 귀하게 여겼다’라고 하는 기록으로부터 고고학적 유적지와 유물, 그리고 역사적 문헌 기록이 일치하고 있는 사실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결국 호남을 중심으로 한 마한의 옥 문화 유물의 출토는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흥군 5세기 초 야막 고분 유적에서 곡옥이 중국제 청동 거울, 대도 등과 함께 출토되었다. 바로 전형적인 최고 권력의 상징물이다. 일본의 삼종의 신기보다 앞서서 삼종의 신기의 원형이 왜 고흥에서 나왔을까?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안동고분’에서는 금동관, 금동신발, 구리거울, 환두도(環頭刀ㆍ둥근 고리 칼) 등 ‘최고 권위자’를 상징하는 유물이 출토된 것이다.

결국 고흥 지역에서 삼종의 신기 가운데 곡옥만 빠지고 출토된 것으로, 안동고분은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 5세기 초 고흥 반도 일대와 섬진강 유역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섬진강·영산강권을 중심으로 5, 6세기 중엽까지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가진 세력이 존속했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 열도의 전반적인 인구 상황을 살펴보면, 하니와라 카즈로(埴原和郞) 도쿄대 명예교수의 저서 ‘일본인의 성립’(日本人の成り立ち,人文書院,1995)에서 ‘대량의 도래인들이 건너 온 시기는 야요이 시대의 개시기(BC 3세기)로부터 초기 역사시대(서기 7세기)까지의 약 1000년 동안 …. 도래인들이 가장 많이 증가하는 추정에서 살펴보면 1000년 동안의 도래인 인구는 약 150만 명이며, 7세기 초의 시기에서의 조몬계(繩文系)와 도래인의 인구 비율은 1대 8.6이 된다’고 했다.

홍윤기 교수도 저서 ‘일본속의 구다라,백제’에서 ‘이것을 쉽게 말하자면 불과 1만8000명 미만의 선주민(조몬인)과 150만 명의 도래인들이 그 후 1300년 간에 증가해 온 것이 오늘의 일본인 인구 1억4000만 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래인의 숫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 인구의 약 80%이상인 1억1200만명이 넘는다는 통계 수치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 일본인들의 주류가 한반도나 중국 대륙으로부터 일본열도로 진출한 사실을 인류학적으로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따라 물따라 역사의 물결따라 일본열도로 진출했다면 사람들을 따라, 이주민들이 지니고 있던 상당한 정도의 문화와 역사가 함께 건너가지 않았을까? 한반도 서남해안 호남 지역을 지나지 않고는 이러한 역사적 큰 물결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BC 3세기에 한반도에서 최첨단의 벼농사 기술의 주체는 누구였을까? 어느 지역이었을까? 원래 벼농사는 노동력 집약의 성격이 강하고 일정 기간 이상의 인구와 정착 생활이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벼농사와 관련된 선진 기술까지 갖추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가장 기본적인 의문만 갖더라도 나머지 해답은 쉽게 나올 것이다. 답은 바로 한반도 서남부 호남지역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과연 벼이삭만 들고 갔을까? 그리고 시기적으로 보아 아직 백제가 등장하기 이전인 관계로 마한 소국들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영산강, 탐진강, 섬진강 등 풍부한 강들과 서남해안 지역의 ‘해상(내수면 포함) 고속도로’를 통해 우선 일본열도의 큐슈 북부 지역으로 건너갔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혼슈 최남단 야마구찌현(山口)·시모노세키(下關) ‘망향의 도래인 유적지’로 유명한 도이가하마(土井が浜, 2300∼2000년전 야요이시대)유적지에서 일정한 방향으로 이차 장례를 지낸 인골들이 발견되었고, 유골들이 한반도의 호남지역과 중국대륙의 산동반도에 있는 고향을 향해서 묻혀 있는 것을 보면 더 많은 설명도 필요 없을 것 같다.

현재의 일본사회의 독자적인 성격과 직결되어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결정적 시기에 해당되는, 약2000 년 전의 일본 사회의 방향성과 상징성이 어디로부터 무엇이 어떻게 건너왔는지 더욱 명백해진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 사회가 야요이 시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독자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하는 기본적인 틀이 형성되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단계에서 이곳 호남지역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호남지역의 역사적 중요성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를 토대로 호남은 닫힌 지역사회가 아니고 서해와 남해로 열려 있는 한중일 동북아시아 국제화 사회의 주도적 역할을 위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야 것 같다. 호남인들에게는 이처럼 국제적DNA가 역사적으로 유전되고 있기 때문이다. 옥 문화 발달사를 통해 21세기 국제사회에서 호남과 대한민국의 발전 가능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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