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찬 바람 속 기약 없는 하역 대기에 시간도 헝클어진다
2015년 02월 09일(월) 00:00 가가
<2> 여름은 하역의 계절


남극 세종과학기지에 머무는 월동대에게 여름은 하역의 계절이다. 195t에 이르는 유류와 정기 보급품 하역 개시 명령이 떨어지면 한밤중에라도 부두에 불이 켜지고 대원들은 모두 바람 부는 바다로 나간다.
아름다움을 말하기 전에 생활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 남극에 있다고 하면 대부분 ‘거기 춥잖아. 몇 도나 돼?’ 이렇게 묻지만 이런 곳을 잘 아는 사람은 ‘바람은 얼마나 세게 부니?’ 라고 묻는다. 15m/s부터 눈폭풍 블리자드로 분류한다. 바람의 세기가 20m/s를 넘어가면 건물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기지 밖에서 하는 활동은 날씨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는다. 좋지 않은 날씨는 근심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휴식의 논거가 되기도 한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는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몇 개로 나뉜다. 기지에 머무는 사람 전체를 1로 보면 나가고 싶은 사람이 1/3, 나가야 하는 사람이 1/3, 나가기 싫은 사람이 1/3 쯤 되는 것 같다.
기간을 정하고 남극에 머무는 하계연구원들은 실험 데이터를 일정량 이상 수집해야 하는데 날씨가 안 좋으면 밖에 나갈 수가 없다. 바람이 세게 불면 보트를 띄우기 힘들어 해상활동이 어렵고 안개가 짙으면 설상차 운행이 힘들기 때문에 육상활동이 어렵다. 그런 날에는 현관에 신발이 많아진다.
날씨가 좋아도 조디악을 띄우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보트정비동에서 크레인으로 조디악을 부두에 가지고 가야 한다. 조디악 1대 움직이려면 최소 운전사 1명, 보조사 2명이 필요하다. 해변에 접안이라도 하려면 보조사들은 끌고 살피고 밀어야 한다.
남극의 여름은 1년 중 가장 따뜻한 기간이다. 남극을 방문한 하계연구원들은 펭귄과 스쿠아의 생태를 연구하고, 이끼의 광합성 연구, 눈 위에 사는 미생물 연구, 빙하와 암석과 토양의 연구 등을 한다. 기지 근처 바다와 산, 들판에서 마리안 소만, 포터소만, 백두봉, 아리랑봉, 가야봉 등에서 시료를 채집한다.
한국에 돌아간 연구원들은 이 시료가 품고 있는 축적된 시간을 펼쳐서 이것은 왜 이런지 저것은 왜 저런지를 분석한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연구도 한다. 옆새우(Gondogeneia antarctica)와 바다나비(Limacina helicina antarctica)를 통해 큰 바다가 얼마나 산성화 되었는지, 이대로 산성화가 계속되면 70년 후, 100년 후의 지구는 어떻게 될지를 예측한다.
월동대에게 남극의 여름은 하역이 이뤄지는 기간이다. 상자들이 어디선가 많이 와서 어디론가 많이 간다. 195t의 유류하역, 정기보급품 하역, 연구시료·폐기물 반출물 선적이 시작되면 백야 속에서 애써 확립해놓은 시간의 구획이 모조리 무너진다. 그래도 시작되면 차라리 괜찮다. 날씨가 안 좋아서 큰 배들이 피항하고, 하역을 앞둔 채 대기 중일 때엔 이후 일정을 재조정해야 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더 크다.
한 밤 중이라도 하역 개시 연락이 오면 부두에 불이 켜진다. 대원들은 말없는 말을 하며 안전화를 신고 바람 부는 바다로 나간다. 파도가 높지 않으면 바지선과 조디악을 이용해 바다에 떠 있는 큰 배와 부두를 오가며 컨테이너를 싣거나 내린다. 하역작업 기간에 대원들은 아예 밥을 많이 먹거나 오히려 밥을 적게 먹는다. 그런 게 눈에 보일 땐 그 고단함과 스트레스가 절절히 체감됐다. 나는 모든 작업에 동일하게 참여하겠다고 말했지만 누군가는 통신실을 지켜야 했다. 통신실에 있다가 조리장님과 함께 따뜻한 차를 끓여서 보온병에 담고 비스킷과 컵라면도 같이 부두로 내어갔다. 대원들은 하얀 입김을 뿜으며 잠깐의 휴식을 아이처럼 기뻐했다.
무전은 원래 짧고 객관적인 명확한 단어를 사용하여 보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어미, 어조 한끝으로도 느낌이 확 달라진다. 특히 밖에서 듣는 안의 무전과 안에서 듣는 밖의 무전은 굉장히 다르다. 현장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면 무전이 생뚱맞게 변한다. 바람이 세게 부는 바다, 위태로운 보트에서 듣는 무전은 듣는 사람에게 안도가 되어 주어야 한다. 대원들이 밖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알고 있을수록 풍향, 풍속을 알려주는 것 뿐 아니라 집 밖의 아이를 걱정하는 것 같은 엄마의 말투로 무전을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무전 뿐 아니라 입에서 공기를 가르며 나가는 모든 말의 파장을 고려해야 한다. 1월에는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는 연습을 했다. 알게 모르게 방해가 되지 않는지, 폐를 끼치지 않는지, 내가 갖는 그런 마음 자체가 상대방이 나를 불편해 하게 되는 이유가 되지 않는지를 살피려고 했다. 반농반진의 이야기 포화 속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했다.
어느 날은 외로워서 혈압을 쟀다. 꽉 붙잡히는 느낌이 그리웠다. 붙들리는 느낌이 그리웠다. 안정감이 필요했다. 내가 쓰는 언어가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이 절실했다. 아름다움과 죽음이 가까이에 있고 일터와 쉼터가 몇 미터 차이로 있다.
매일 밥 먹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사람 사이에서는 긴장과 탐색이 흐른다. ‘말뿐인 사람’, ‘입만 살아가지고’ 라는 말도 있지만 말은 큰 힘이 된다. 날씨를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나마 제어할 수 있는 것들에 신경 쓰고 싶다.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TV를 통해 본다. 현실감이 없다. 물건의 값이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한다. 사건사고 소식에 익숙한 지명이 등장한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줄 알았는데 먼나라 이야기 같다.
밖에서 오래 있지 않는데도 그을렸다. 샤워를 마친 뒤 로션을 바르려고 다리에 손을 가져가면 흰 허벅지와 검게 변해가는 손의 대조가 느껴진다. 자외선차단제를 바르려고 얼굴에 손을 갖다 대면 흰 손과 검게 변해가는 얼굴의 대조가 느껴진다. 하루씩 살갗의 명도와 채도가 달라진다. 이것은 내가 남극에서의 시간, 하루를 느끼는 방식 중 하나이다. 남극을 나갈 때 내 허벅지가 남극의 자외선을 직접 받지 않은 실험대조군으로 잘 쓰일 것 같아 기대된다.
곧 뜨는 해가 지면 밤이다. 이런 밤이 두 달째 계속되고 있다. 밖은 춥고 안은 건조하다. 다행이도 모두에게 베개가 있다. 베개가 비타민 몇 알보다 힘이 세다. 머리를 기대고 잠든 이의 몸에서 베개가 그날의 상한마음과 피로를 뽑아내 없애주기를 기도한다.
〈남극 세종과학기지 28차 월동대 생물연구원〉
기간을 정하고 남극에 머무는 하계연구원들은 실험 데이터를 일정량 이상 수집해야 하는데 날씨가 안 좋으면 밖에 나갈 수가 없다. 바람이 세게 불면 보트를 띄우기 힘들어 해상활동이 어렵고 안개가 짙으면 설상차 운행이 힘들기 때문에 육상활동이 어렵다. 그런 날에는 현관에 신발이 많아진다.
한국에 돌아간 연구원들은 이 시료가 품고 있는 축적된 시간을 펼쳐서 이것은 왜 이런지 저것은 왜 저런지를 분석한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연구도 한다. 옆새우(Gondogeneia antarctica)와 바다나비(Limacina helicina antarctica)를 통해 큰 바다가 얼마나 산성화 되었는지, 이대로 산성화가 계속되면 70년 후, 100년 후의 지구는 어떻게 될지를 예측한다.
월동대에게 남극의 여름은 하역이 이뤄지는 기간이다. 상자들이 어디선가 많이 와서 어디론가 많이 간다. 195t의 유류하역, 정기보급품 하역, 연구시료·폐기물 반출물 선적이 시작되면 백야 속에서 애써 확립해놓은 시간의 구획이 모조리 무너진다. 그래도 시작되면 차라리 괜찮다. 날씨가 안 좋아서 큰 배들이 피항하고, 하역을 앞둔 채 대기 중일 때엔 이후 일정을 재조정해야 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더 크다.
한 밤 중이라도 하역 개시 연락이 오면 부두에 불이 켜진다. 대원들은 말없는 말을 하며 안전화를 신고 바람 부는 바다로 나간다. 파도가 높지 않으면 바지선과 조디악을 이용해 바다에 떠 있는 큰 배와 부두를 오가며 컨테이너를 싣거나 내린다. 하역작업 기간에 대원들은 아예 밥을 많이 먹거나 오히려 밥을 적게 먹는다. 그런 게 눈에 보일 땐 그 고단함과 스트레스가 절절히 체감됐다. 나는 모든 작업에 동일하게 참여하겠다고 말했지만 누군가는 통신실을 지켜야 했다. 통신실에 있다가 조리장님과 함께 따뜻한 차를 끓여서 보온병에 담고 비스킷과 컵라면도 같이 부두로 내어갔다. 대원들은 하얀 입김을 뿜으며 잠깐의 휴식을 아이처럼 기뻐했다.
무전은 원래 짧고 객관적인 명확한 단어를 사용하여 보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어미, 어조 한끝으로도 느낌이 확 달라진다. 특히 밖에서 듣는 안의 무전과 안에서 듣는 밖의 무전은 굉장히 다르다. 현장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면 무전이 생뚱맞게 변한다. 바람이 세게 부는 바다, 위태로운 보트에서 듣는 무전은 듣는 사람에게 안도가 되어 주어야 한다. 대원들이 밖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알고 있을수록 풍향, 풍속을 알려주는 것 뿐 아니라 집 밖의 아이를 걱정하는 것 같은 엄마의 말투로 무전을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무전 뿐 아니라 입에서 공기를 가르며 나가는 모든 말의 파장을 고려해야 한다. 1월에는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는 연습을 했다. 알게 모르게 방해가 되지 않는지, 폐를 끼치지 않는지, 내가 갖는 그런 마음 자체가 상대방이 나를 불편해 하게 되는 이유가 되지 않는지를 살피려고 했다. 반농반진의 이야기 포화 속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했다.
어느 날은 외로워서 혈압을 쟀다. 꽉 붙잡히는 느낌이 그리웠다. 붙들리는 느낌이 그리웠다. 안정감이 필요했다. 내가 쓰는 언어가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이 절실했다. 아름다움과 죽음이 가까이에 있고 일터와 쉼터가 몇 미터 차이로 있다.
매일 밥 먹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사람 사이에서는 긴장과 탐색이 흐른다. ‘말뿐인 사람’, ‘입만 살아가지고’ 라는 말도 있지만 말은 큰 힘이 된다. 날씨를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나마 제어할 수 있는 것들에 신경 쓰고 싶다.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TV를 통해 본다. 현실감이 없다. 물건의 값이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한다. 사건사고 소식에 익숙한 지명이 등장한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줄 알았는데 먼나라 이야기 같다.
밖에서 오래 있지 않는데도 그을렸다. 샤워를 마친 뒤 로션을 바르려고 다리에 손을 가져가면 흰 허벅지와 검게 변해가는 손의 대조가 느껴진다. 자외선차단제를 바르려고 얼굴에 손을 갖다 대면 흰 손과 검게 변해가는 얼굴의 대조가 느껴진다. 하루씩 살갗의 명도와 채도가 달라진다. 이것은 내가 남극에서의 시간, 하루를 느끼는 방식 중 하나이다. 남극을 나갈 때 내 허벅지가 남극의 자외선을 직접 받지 않은 실험대조군으로 잘 쓰일 것 같아 기대된다.
곧 뜨는 해가 지면 밤이다. 이런 밤이 두 달째 계속되고 있다. 밖은 춥고 안은 건조하다. 다행이도 모두에게 베개가 있다. 베개가 비타민 몇 알보다 힘이 세다. 머리를 기대고 잠든 이의 몸에서 베개가 그날의 상한마음과 피로를 뽑아내 없애주기를 기도한다.
〈남극 세종과학기지 28차 월동대 생물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