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예향] 한 잎 한 잎, 꽃이 예술이 되는 순간
2025년 09월 18일(목) 15:40
압화 작품 600점 전시 한국압화박물관…“알고 보면 더 재미있어요”

올해 대한민국 압화대전에서 종합대상을 받은 신정옥 작 ‘사랑의 굴레’. /최현배 기자

배롱나무 꽃이 붉게 지면서 무더웠던 여름이 끝나가고 들길에는 코스모스가 피어나며 가을이 성큼 다가온다. 꽃은 늘 이렇게 계절을 알리지만 그 아름다움은 짧기에 아쉬움을 남긴다. 잠시 스쳐가는 꽃잎의 향과 빛깔을 붙잡아 두고 싶었던 마음은 결국 ‘압화’라는 새로운 예술로 이어졌다.

압화(押花·pressed flower)는 식물의 꽃, 잎, 줄기 등을 눌러 건조한 후 회화적으로 재구성하는 예술이다. 단순히 말린 꽃이 아니라 식물의 생명과 시간을 붙잡아내는 기술이다. 우리말로 ‘꽃누르미’ 또는 ‘누름꽃’이라고도 불린다.

압화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16세기 영국에서는 귀족들이 여행길에 모은 야생화와 약초를 건조해 보관했고 일본에서는 에도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초기에는 식물의 형태와 특징을 학습하기 위한 기록물 성격이 강했지만 점차 조형성과 예술성을 띠며 오늘날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한국 압화는 비교적 늦게 시작됐지만 빠르게 성장했다. 한국압화 원로로 양정인, 이성자, 김숙자씨를 꼽을 수 있다. 1980년대 초 양정인씨가 일본에서 배운 기술을 소개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이어 1987년 이성자씨가 국내 최초로 압화 개인전을 열어 가능성을 입증했고, 1990년대에는 김숙자씨가 체계적인 연구와 교육 과정을 마련했다. 이 시기를 거쳐 한국 압화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하나의 예술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대 들어 구례를 중심으로 한 압화 연구와 대회 개최, 아카데미 운영이 이어지면서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구례읍에 자리한 한국압화박물관은 세계 유일의 압화를 주제로 한 박물관이다. 압화의 ‘A부터 Z까지’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전국의 강사들이 이곳에서 수업을 받고 다시 각 지역에서 강좌를 열고 있다.

2006년 전시관으로 개관해 10년째인 2016년 정식 박물관으로 등록되었다. 이곳에는 대한민국 압화대전 대통령상 수상작을 비롯해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 6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실제 꽃잎과 잎사귀를 말려 붙인 압화 작품. 실물 같은 생동감과 섬세한 색감을 자아낸다. /최현배 기자
매년 봄 열리는 대한민국 압화대전은 2002년부터 시작되어 올해로 24회를 맞았으며, 전 세계에서 작품을 접수받는다. 올해는 신정옥 작가의 작품 ‘사랑의 굴레’가 영예의 대통령상을 차지했다. 전시는 박물관 1층에 올해 수상작을, 2층에 역대 수상작을 배치해 압화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게 구성했다.

단순 관람에 그치지 않고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체험도 준비되어 있다. 열쇠고리, 그립톡 등 소품을 만드는 프로그램은 예약제로 운영되며, 소정의 재료비만 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구례군 압화연구회가 운영하는 압화 아카데미는 두 달 동안 진행되는데, 섬진강이나 지리산에서 꽃을 채취하고 건조하며 작품으로 완성하는 전 과정을 배우게 된다. 여행객에게는 단순한 관광이 아닌, 자연과 예술을 체험하는 특별한 시간이 된다.

압화박물관 안내를 맡고 있는 구례군농업기술센터 이지선씨는 “압화는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고 강조한다. 작품을 이루는 재료를 알게 되면 감상이 훨씬 풍성해진다는 것이다.

한국압화박물관 입구에 걸린 압화 작품들. /최현배 기자
실제로 고양이를 표현한 작품은 털을 쓴 것처럼 보이지만, 목화솜과 서양 민들레, 강아지풀을 눌러 만든 것이다. 가까이서 보면 결이 그대로 드러난다. 작품 전체의 배경인 바탕조차도 식물 소재로 채워 넣는 경우가 많다.

장미는 꽃잎을 한 장 한 장 눌러 건조한 뒤 다시 겹쳐 붙여 입체감을 살리고, 목화솜은 동물의 털이나 겨울의 눈송이를 재현하는 데 쓰인다. 억새와 갈대는 바람결을 표현하는 배경 소재로 제격이며, 포도나무 껍질은 목재 질감을 내는 데 활용된다. 단풍잎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을빛을 물들이고, 벚꽃은 흩날리듯 배치하면 봄의 움직임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다. 이런 재료들의 쓰임을 알고 작품을 보면 감상이 한층 더 깊어진다.

압화 조립후 진공마감 단계 과정1. <한국압화박물관 제공>
압화 조립후 진공마감 단계 과정2. <한국압화박물관 제공>


압화 작업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꽃은 말리는 과정에서 갈변되기 쉬워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교체하며 건조해야 한다. 부피가 큰 꽃은 슬라이스 해 말린 뒤 다시 조립해야 원래의 형태를 살릴 수 있다. 포도나무 껍질처럼 농가에서 버려지는 부산물도 작가에게는 귀한 재료다. 작가들은 월동 시기에 벗겨낸 껍질을 수집해 작품에 활용한다. 작품한 점에는 이런 섬세한 공정과 시간, 작가의 인내가 고스란히 스며 있다. 작가들이 작품을 쉽게 판매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품에 들어간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압화는 나라별로 발전 양상도 다르다. 박물관 1층 한쪽에 동서양의 압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서양에서는 16세기부터 귀족과 상류층의 취미로 시작해 생활예술로 이어졌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는 ‘꽃의 언어’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유행했고, 유럽에서는 식물학적 기록과 예술을 겸한 도구로 활용됐다. 일본은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압화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연구와 재료 개발이 꾸준히 이어져 지금도 정교한 기술력에서 앞서 있다. 중국에서는 압화가 상류층의 고급취미로 자리 잡아 주로 수집과 감상 중심으로 이어졌다.

반면 한국은 비교적 늦게 시작했지만 압화대전과 박물관 운영 같은 제도적 뒷받침 덕분에 세계적으로 독창적인 입지를 확보했다. 무엇보다 젊은 세대와 신규 유입이 꾸준히 이어지는 점에서 활력이 크다.

한국압화박물관을 찾은 방문객들이 올해 대한민국 압화대전 수상작들을 감상하고 있다. /최현배 기자
압화박물관은 단순히 꽃을 말려 액자에 담는 공간이 아니다. 꽃의 순간을 붙잡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예술로 승화된 현장이다. 작품 속에 숨겨진 작은 잎맥, 바탕에 깔린 식물 소재, 정성스럽게 조립된 꽃잎들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자연을 온전히 담아낸 또 하나의 세계가 되기도 한다. 꽃을 좋아하는 이들은 물론, 구례에서 특별함을 경험하고 싶은 이들에게 압화박물관은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공간이 되리라 기대된다.

한국압화박물관 옆에는 식물표본전시관과 세밀화 전시관이 함께 자리한다. 압화가 예술로 발전하기 전 식물을 학습적으로 기록했던 표본 과정을 살펴볼 수 있고 식물을 정밀하게 묘사한 세밀화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이 공간들을 함께 둘러보면 압화 작품을 보는 눈이 훨씬 깊어진다. 압화박물관 운영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이다.

/이보람·이진택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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