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의 ‘자연이 건네는 말’] 나비를 세던 사람, 섬에서 다시 날다
2025년 07월 17일(목) 00:00
국립제주박물관 특별전 ‘제주에 나빌레라’의 유리 진열장 앞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춘다. 석주명이 채집한 배추흰나비가 고요히 날개를 펼치고 있다. 흔히 보던 나비일지 몰라도 그 속에는 조선의 과학자가 온몸으로 헤아리고 기록한 자연의 시간과 공간이 응축되어 있다. 석주명은 나비를 수집한 것이 아니다. 그는 나비의 ‘다름’을 이해하려 했고 그것이 ‘같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혀낸 사람이다. 나비의 날개를 통해 그는 생명과 조국 그리고 과학의 언어를 발견했다.

그가 활동하던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나비는 800여 종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러나 석주명은 이를 단 248종으로 재분류했다. ‘줄였다’는 표현은 단순한 감산이 아니라 기존 분류 체계에 대한 과학적 도전이자 반론이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계절이나 지역에 따라 색과 크기가 다른 개체들을 모두 다른 종으로 간주하곤 했다. 석주명은 이런 분류 방식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전국을 돌며 수만 마리의 나비를 채집하고 비교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 내린다. 이것은 종의 차이가 아니라 개체변이라는 것.

이러한 통찰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배추흰나비다. 봄에 우화한 개체는 작고 엷은 빛깔을 띠며 여름과 가을로 갈수록 점점 진해지고 커진다. 이 나비는 당시 세 개 이상의 종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석주명은 시기별로 직접 관찰하고 수치를 기록해 이들이 모두 하나의 생명에서 비롯된 변형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그가 나비를 대하는 태도는 단순히 다르게 생겼다고 해서 다른 이름을 붙이지 말자는 것이었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는 차이보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조건과 맥락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는 한국 생물학사에서 통계를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도입한 연구자 중 하나였다. 나비의 날개 무늬, 크기, 성별 비율, 지역적 분포, 계절에 따른 차이를 모두 계량화했다. 이러한 방식은 자연은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분석의 대상이라는 그의 과학관을 잘 보여준다. 통계를 통해 자연의 규칙을 발견하고 개체의 차이에서 종의 본질을 도출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단지 과학적인 성취가 아니라 조선의 자연을 조선인의 시선으로 이해하려는 자주적 지식인의 실천이었다.

일본 학자들과의 논쟁에서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의 필드워크 자료와 통계를 바탕으로 수십 년 간 학계에서 통용되던 분류체계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특히 일본 학자들의 표본 위주 문자 중심 학문에 비해 석주명의 방식은 현장에서의 관찰과 분석을 중시하는 경험 중심 접근이었다. 그는 조선의 산과 들을 직접 걸으며 데이터를 수집했고 그것이 곧 저항이자 증명이 되었다.

석주명의 마지막 연구 무대는 제주도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가족과 함께 제주로 내려간 그는 제주에서 짧지만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전쟁의 불안 속에서도 그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조선도총서’ 6권을 집필했다. 그에게 제주란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오히려 섬이라는 환경의 고립성과 생물다양성은 나비의 계절적 변이와 지역 분화를 연구하기에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그는 한라산과 송당, 성산 일대를 오르내리며 제주의 나비들을 채집하고 사육했다. 배추흰나비, 왕나비, 노랑나비 등 주요 종들의 변이를 비교하며 한반도 본토와 제주 사이에서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어떤 종이 특산종으로 분화하는지를 분석했다. 일부 개체는 번데기 상태에서 직접 사육해 우화 과정을 관찰하고 그 기록을 섬세한 필체와 손그림으로 남겼다. 제주에서의 연구는 그에게 자연과학자로서의 완성기였다.

이번 국립제주박물관 특별전 ‘제주에 나빌레라’는 석주명의 삶과 연구를 되살리는 동시에 ‘좋은 과학전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국립제주박물관이 기획을 주도했지만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지역 연구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전시의 깊이를 더했다. 이들이 제공한 표본과 해설 덕분에 석주명의 제주 연구는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과학은 중앙만의 것이 아니며 이처럼 지역과 협력해 위대한 과학자를 재조명한 전시는 과학문화의 본보기라 할 만하다.

우리는 지금도 생물다양성을 쉽게 오해한다. 사라지는 생명들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변이와 종을 혼동한 채 이름만 바꾸곤 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별하고 기록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책임이다. 석주명이 그랬듯이 말이다. 나비는 사라질 수 있어도 기록은 남는다. 지금 이 순간, 한라산 자락에서 다시 날고 있는 이 전시는 단지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자연을 마주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제안이다.

지금 석주명이 필요한 이유다.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실시간 핫뉴스

많이 본 뉴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