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계엄 트라우마와 분노 속 호외 만든 광주일보 기자들”
2024년 12월 15일(일) 20:30
日 니시니혼신문 3일 제작 과정 보도
계엄군 들이닥칠 위기감 속 빠른 제작
5·18 아픈 역사도 사진과 함께 실어
“광주일보에는 (계엄)선언 직후 30여 명의 기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동시에 전달된 계엄포고령 문구가 긴장을 더하게 했다. ‘모든 보도와 출판은 계엄사령부의 통제를 받는다.’ 선언 30분 후부터는 온라인에 속보기사를 내보내면서 동시에 호외제작에 나섰지만, 계엄군이 언제 들어 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출입문을 폐쇄하고 기자들은 지하주차장으로 통하는 문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었다.”

지난 12일 광주일보를 찾아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지난 3일 밤 10시 23분 이후의 편집국 상황을 취재한 니시니혼신문이 지난 14일 온라인을 통해 이를 보도했다.<사진> 이들 신문은 계엄 상황에서 호외를 만들게 된 배경, 제작 과정의 긴장감, 기자들의 각오, 5·18 민주화운동 당시 12일간 발행하지 못했던 광주일보의 아픈 역사 등을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실었다.

“계엄 하에서 정권 비판 기사를 쓸 경우 신변에 위험이 미칠 가능성도 있어 광주일보는 기사에 기자 이름을 쓰는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했었다. 결국 기자들의 이름을 다 쓰기로 결정했다. 정치부 김해나 기자는 ‘체포된다면 체포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혼란 상황이었던 국회에서 계엄해제요구결의안의 채택이 무사히 진행되지 못한다면 군 진입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 최권일 편집국장은 1시간 안에 (호외)지면 제작을 끝내라고 지시했다.”

신문은 “4일 새벽 1시 1분 계엄해제결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뒤 새벽 4시 30분 윤 대통령이 해제를 선언하자 기자들은 집으로 돌아가 새벽까지 온라인으로 기사를 계속 전송했다”고 전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12일간 신문을 발행하지 못한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의 1980년 6월 2일 지면에 대해서도 자세히 보도했다. 신문들은 ‘뼈를 깎는 아픔을 참으면서…’를 제목으로 한 사고와 ‘광주사태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만 쓴 1면 광고가 실린 당시 지면을 사진으로 게재했다.

“광주일보의 전신 전남일보는 5·18 민주화운동 3일 후부터 12일간 계엄령으로 신문을 발행하지 못했다. 재발행된 신문에서는 분함과 반성을 담은 사고를 게재했다. 그 후 검열로 지면 일부가 공백으로 나가는 경우가 계속되었다. 광주일보에는 당시 기자들이 사장에게 제출한 사표가 남아있다. ‘사람이 개처럼 끌려가 죽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기자들은 없지만, 최 편집국장은 그 분노와 공포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생각은 후배들에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문은 마지막으로 5·18 민주화운동 이후 계엄령에 의한 보도통제로 검열을 받은 기사가 모두 1만1600건, 이 가운데 삭제된 기사가 1700건에 이른다는 점을 언급하며 기사를 끝맺었다.

한편 니시니혼(서일본)신문은 1877년 창간해 후쿠오카현, 사가현, 나가사키현, 구마모토현, 오이타현 등 일본 서부지역에서 발행되는 대규모 지역신문이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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