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값 폭락 속 벼멸구 습격…전남 농민 억장 무너진다
2024년 09월 19일(목) 19:15
르포-벼멸구 피해 속타는 보성 들녘
추수 앞두고 곳곳 벼 말라죽어
전남 재배 면적의 7.3%가 피해
쌀값 떨어지고 고물가에 3중고
농민들 “농사 포기할 판” 한숨만
“피해지역 주변까지 일제 방제해야”

벼멸구 피해로 말라죽은 벼.

“쌀값이 끝없이 떨어지고 있는데, 폭염으로 인한 벼멸구 피해까지 겹치니 농사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수를 한 달 남짓 앞둔 광주·전남 지역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쌀값 폭락으로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폭염이 길어지면서 추석 연휴 전후로 벼멸구 피해까지 확산됐기 때문이다.

광주일보 취재진이 19일 찾은 보성군 보성읍의 한 논에는 노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벼멸구 피해를 입은 벼들이 말라비틀어져 쓰러진 것이다. 논 한 마지기(660㎡)에만 이러한 구멍들이 수십여개에 달했다.

보성에서 15년째 벼 농사를 짓고 있는 윤병구(52)씨는 “추석 전만해도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갑자기 ‘폭탄’을 맞아버렸다”고 한탄했다.

시들어버린 벼를 매만지던 윤씨는 “어제까지만 해도 이웃 논에 (벼멸구 피해가) 조금 생겼다 싶더니 하루 사이에 우리 논까지 내려왔다”며 “멸구가 먹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번지기 때문에 방제가 이미 늦은 듯 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윤씨를 비롯한 광주·전남 농민들은 “추수를 앞두고 벼가 픽픽 쓰러지니 허탈하다”고 입을 모은다. 1년 땀이 물거품이 될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전남도 농업기술원에 따르면 이날까지 전남 지역 전체 벼 재배면적(14만7715㏊)의 7.3%의 논(1만776㏊)에 벼멸구 피해가 발생했다. 보성이 3182㏊로 피해가 가장 크고 장흥 1734㏊, 해남 1146㏊, 화순 1318㏊, 고흥 973㏊ 등이 뒤를 이었다.

최근 전남에서 벼멸구 피해는 2022년 995㏊, 2023년 175㏊에 그쳤는데, 올해 벌써 1만776㏊의 피해가 발생했다. 평년(3876㏊)과 비교해도 178% 증가한 수치다. 문제는 추석연휴 기간 방제가 소홀한 틈을 타 피해가 더 확산됐다는 점이다.

벼멸구는 벼를 숙주식물로 하는 해충으로, 6~7월 중국에서 유입돼 벼 포기 아래에 서식하고 벼 출수 이후(8~9월) 볏대의 즙액을 먹는다. 볏대가 노랗게 타들어가다 쓰러진다. 심하면 벼가 고사하고 멸구의 배설물 때문에 그을음병도 생긴다.

19일 보성군 보성읍에서 농민 윤병구씨가 벼멸구 피해로 쓰러진 벼를 살펴보고 있다.
농민들은 최근 쌀값이 폭락에다 벼멸구까지 겹쳐 생계가 위태롭다고 호소하고 있다.

장흥군 회진면 덕산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황인성(58)씨는 “지난해까지 6만원 넘던 조생벼 40㎏이 최근 5만2000원에 거래되고 있다. 생산비도 건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 “기름값을 비롯해 농자잿값 등이 모두 올랐는데 쌀값만 떨어지는 상황에서 병충해 피해까지 확산하니 미칠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주변 논들이 모두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황씨는 2~3차례 방제를 거듭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부의 친환경 농업정책 탓에 저농약을 여러 차례 살포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은 2~3배 더 든다고 황씨는 설명했다.

하지만 농민들의 걱정은 한층 깊어지고 있다. “벼멸구 피해를 입은 나락의 경우 농협이 ‘미질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가격을 더 낮게 책정할테니, 그렇지 않아도 떨어진 쌀값이 더 폭락할 것”이라는 우려다.

전남도는 벼멸구 피해가 급속도로 확산하자 32억원(도 6억1000만원·시군25억9000만원)의 예산을 편성해 긴급 방제를 지원한다고 18일 발표했다. 피해가 확산할 경우 예비비를 사용해 추가 지원을 검토할 방침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광주전남연합, 전국쌀생산자협회 광주전남본부는 강도높은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이날 성명을 통해 “정부와 전남도, 농협 등이 협력해 신속하고 광범위한 벼멸구 방제를 진행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만큼 피해지역 주변까지 일제히 방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지난 2020년 태풍 피해를 입은 벼를 매입한 것처럼 정부가 벼멸구 피해 벼를 수매해 농가 피해를 보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농민들은 “유례없는 폭염에도 성실하게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쌀값 폭락과 벼멸구 확산으로 생계마저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수확을 포기하는 농가가 속출하지 않도록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주장했다.

/글·사진 보성=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

/장흥=김용기 기자 ky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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