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 우리의 기다림에 대하여 -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4년 09월 02일(월) 00:00 가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일은 아주 일상적 일이다. 사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기다리는 일로 보낸다. 기다림은 아직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것에 대한 특별하고 적극적인 기대다. 그 특별함은 무엇인가를 향해서, 자신을 개방하는 내밀하고 간절한 자세로써 나타난다.
한편 기다림은 자주 불안과 실망을 동반한다. 대상에 의해서 우리가 쉽게 좌우되고 흔들리며 왜곡되는 탓이다. 게다가 기다리던 것을 끝내 얻지 못했을 때 그 기다림은 헛되고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오직 기다림의 이야기로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 있다. 사뮈엘 베케트(1906~1989)의 ‘고도를 기다리며’다. 이 작품은 1969년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대표작으로 제목만으로도 너무나 유명한 희곡이다.
두 명의 떠돌이가 주인공으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어느 시골 길가 나무 옆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고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면서, 두 주인공은 쓸 데 없이 구두를 벗으려 애를 쓰거나 실없는 말장난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때 한 양치기 소년이 나타나서 “고도 씨가 오늘 밤에는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다”라고 전한다. 그러나 두 주인공은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기다리는 거야 버릇이 돼 있으니까”라고 한다. 기다림은 습관이라는 이 표현은 기다림은 일상적 흔한 기다림이 아니고, 당위의 의미로 들린다. 대상이 오고, 안 오고와는 관계없이 그냥 기다리는 것이 의무인 듯 말이다. 이 두 사람에게 기다림은 대상과 관계없이 중단될 수 없음을 말한다. 기다리는 것이 곧 이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최선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지겹고 권태로워지면 ‘너무 심심한데 목이나 매볼까’라고까지 한다. 작가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아무도 안 오고, 아무도 안 떠나고”라는 표현으로 기다림의 시간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는 기다림의 시작만 있고 전개도 변화도 없다. 존재 여부조차 알 수 없는 고도라는 존재를 그저 기다리는 것이 전부다. 양치기 소년은 막이 끝날 때마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상황에도 이 두 주인공은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다.
도대체 고도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그냥 아는 사람”, “거의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왜 고도를 기다리는가? 하지만 생각하면 의미 없는 말은 아니다. 잘 아는 대상을 왜 약속 없이 기다리며 찾을 것인가? 또 기다릴 것도 없는 삶이 더 나은 것인가? 삶에서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무엇인가를 애써 기다릴 이유가 없다. 두 사람은 기다리는 것. 그것이 곧 자신들의 삶이기에, 고도의 존재가 불확실해도 기다림을 중단할 수 없다. 이 기다림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로 보일 수 있다. 오는 것이 확실해야 기다리고, 받을 것을 먼저 확인한 후에야 믿으며, 얻는 것이 분명해야만 다가가는 요즘 세상 법에 따르면 더 그럴 것이다.
타인의 고도가 ‘나’의 고도가 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작가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기다림을 중단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양치기 소년이 말하는 ‘내일 온다는 고도’가 내일 오지 않아도 두 사람은 계속 기다릴 것이다. 산다는 것은 기다림을 배우며, 기다리는 일이 아니던가. 다만 우리는 지금 어떤 고도를 기다릴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다. 고도를 잘 아는 사람도, 가르쳐 줄 사람도 없다. 각자의 고도는 각자가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지향하는 것이 없이는 기다릴 것도 없고, 기다릴 것이 없다면, 희망할 것도, 행동할 이유도 없다. 기다리는 것은 삶의 다른 표현이며, 고도는 기다림이 향하는 지향점이다.
어떤 고도를 기다릴 것인가? 이 결정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에서 나온다. 기다림은 시간적 행위가 아니고, 주어진 자신을 넘어서서 기투하는 의지이며 용기다. 기다리는 고도가 오늘, 또는 내일도 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어떤 고도를 기다리는가?를 되물으며 멈추지 않아야 한다.
도대체 고도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그냥 아는 사람”, “거의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왜 고도를 기다리는가? 하지만 생각하면 의미 없는 말은 아니다. 잘 아는 대상을 왜 약속 없이 기다리며 찾을 것인가? 또 기다릴 것도 없는 삶이 더 나은 것인가? 삶에서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무엇인가를 애써 기다릴 이유가 없다. 두 사람은 기다리는 것. 그것이 곧 자신들의 삶이기에, 고도의 존재가 불확실해도 기다림을 중단할 수 없다. 이 기다림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로 보일 수 있다. 오는 것이 확실해야 기다리고, 받을 것을 먼저 확인한 후에야 믿으며, 얻는 것이 분명해야만 다가가는 요즘 세상 법에 따르면 더 그럴 것이다.
타인의 고도가 ‘나’의 고도가 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작가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기다림을 중단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양치기 소년이 말하는 ‘내일 온다는 고도’가 내일 오지 않아도 두 사람은 계속 기다릴 것이다. 산다는 것은 기다림을 배우며, 기다리는 일이 아니던가. 다만 우리는 지금 어떤 고도를 기다릴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다. 고도를 잘 아는 사람도, 가르쳐 줄 사람도 없다. 각자의 고도는 각자가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지향하는 것이 없이는 기다릴 것도 없고, 기다릴 것이 없다면, 희망할 것도, 행동할 이유도 없다. 기다리는 것은 삶의 다른 표현이며, 고도는 기다림이 향하는 지향점이다.
어떤 고도를 기다릴 것인가? 이 결정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에서 나온다. 기다림은 시간적 행위가 아니고, 주어진 자신을 넘어서서 기투하는 의지이며 용기다. 기다리는 고도가 오늘, 또는 내일도 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어떤 고도를 기다리는가?를 되물으며 멈추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