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메이지 신정부는 왜 번(藩)을 없애려 했나, 폐번치현(廢藩治縣)-가쓰타 마사하루 지음,
2024년 06월 21일(금) 00:00
김용범 옮김
153년 전으로 역사의 시계를 돌려보자. 1871년 6월 조선은 신미양요를 겪은 후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그 해 일본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같은 해 8월 29일(음력 7월 14일) 일본 메이지 신정부 대신이 “번(藩)을 폐하고 현(縣)을 만든다”는 천황의 칙서를 낭독한다. 단기간에 극비로 단행된 ‘폐번치현’에 의해 261개의 번은 사라졌다. 독자들에게 생소한 번(藩)은 에도 막부시대 영주(다이묘)가 다스리던 영지를 의미한다. 앞서 막부는 1867년 12월 왕정복고 쿠데타에 의해 막을 내렸고, 번에 딸린 토지와 영민(領民)들은 천황에게 반환(판적봉환·版籍奉還)됐다.

신간은 일본 근대사를 전공한 가쓰타 마사하루 고쿠시칸대학 명예교수가 연구자가 아닌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집필한 ‘폐번치현 근대국가탄생의 무대 뒤’를 번역한 것이다. 당시 문서와 일기류, 회의록, 신문보도 등 1차 사료를 인용해 현장감있게 서술했다. 저자는 ‘폐번치현’ 칙서를 낭독한 1871년 8월 ‘번이 사라진 날’에서 시작해 이와쿠라(岩倉)사절단이 미국과 유럽으로 떠나는 같은 해 12월까지 급박하게 변하는 정세를 세밀하게 살피며, ‘폐번치현’이 갖는 의미를 보여준다.

책은 크게 ‘유신정권이 탄생한 날’과 ‘중앙집권화로 가는 길’, ‘일대비약으로서의 폐번치현’, ‘메이지 중앙집권국가의 탄생’ 등 6개 장으로 구성돼 있다. 저자는 “폐번치현은 에도시대의 막부체제라 불리는 분권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중앙집권 체제인 일본 근대국가를 탄생시켜, 그후의 근대화 정책을 급발진시킨 장기적 의의를 지닌다”고 밝힌다.

“폐번치현은 일본을 봉건국가(에도시대의 막번제 국가로 불리는 에도막부와 번에 의한 분권국가)에서 근대국가(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국가)로 이행시킨 사건이었다. 폐번치현을 포함한 메이지 유신에 의해 일본 근대국가는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막부(쇼군)와 번(다이묘)은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일본 메이지 신정부는 왜 ‘폐번치현’을 단행했을까. 저자는 “다가오는 구미열강의 압력 속에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국가 수립이 반드시 필요했다”면서 “강력한 정부의 힘으로 제번(諸藩)을 통제하에 두고 중앙집권화를 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유신정권은 직할지에 둔 부·현과 함께 번을 지방행정구획으로 하는 부번현 세 통치체제를 두어, 이체제의 실체화를 꾀하기 위해서 판적봉환을 단행했다. 법적·제도적으로 번주는 번의 주인이 아닌게 되었고, 지방관(비번사)이 되었다. 이것으로 부번현제 통치체제는 진정한 의미로 지방제도로서 확정되어, 제번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신간은 1867년 ‘왕정복고 대호령’부터 1871년 ‘폐번치현’까지 5년여 동안 봉건체제에서 근대국가로 도약하는 일본의 모습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일본 신정부는 ‘폐번치현’을 통해 중앙집권 통치체제를 강화한 후 ‘서양문명화(근대화)’를 국가적 목표로 설정했다. 저자는 이와쿠라 사절단 출발 시점으로 장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때 사절단을 떠나보내는 태정대신의 송별사가 눈에 띈다.

“가거라, 바다를 화륜으로 옮겨가며, 육지를 기차로 돌며, 만리를 돌며 영명을 사방에 선양하여 무사히 돌아올 것을 기원한다.”

신간은 근대 일본 뿐만 아니라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마는 19~20세기 조선의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알기 위해서 이웃나라 근대기의 역사 흐름 속으로 들어가야 함을 새삼 깨닫는다.<교유서가·1만9800원>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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