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천 기자가 추천하는 책] 들꽃수업 - 심재신 지음
2024년 05월 31일(금) 00:00
사시사철 작고 여린 들꽃, 잔잔한 삶의 향기로 다가온다
다음은 어떤 꽃을 말하는 것일까. 꽃받침 5개로 갈라져 있고 암술은 하나이지만 수술은 4개다. 학명은 ‘구부러진 수술을 가진 큰 꽃’이다. 바닥에 떨어진 이 꽃잎은 여름에 운치를 선사한다.

꽃에 대해 세세한 관심을 가진 이가 아니면 무슨 꽃을 말하는지 알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여름이라는 계절, 학명에 담긴 모양을 상상해보면 짐작할 수도 있을 듯하다. 조금만 힌트를 주자면 기성세대들은 어린 시절 동네 어귀나 길가에서 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가에서 키울 수 있어서 ‘양반꽃’이라고도 불렸다.

바로 능소화다. 꽃말은 ‘그리움’이다. 능소화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옛적 하룻밤 임금의 처소에 들었던 한 궁녀는 오매불망 임금이 다시 찾아주기를 기다린다. 그녀는 간절히 임금을 기다리다 결국 죽고 만다. 그리고 자신의 처소가 있던 담장에서 꽃으로 피어난다. 죽은 궁녀의 이름은 ‘소화’였다.

‘하늘을 능멸하다’는 뜻을 지닌 능소화는 여름철 의지할 곳만 있으면 기어올라가는 생명력이 강한 꽃이다.<창비 제공>
능소화에 담긴 처연한 숙명을 시로 형상화한 박남준 시인의 ‘당신을 향해 피는 꽃’(‘적막’ 창비, 2005)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능소화를 볼 때마다 생각난다/ 다시 나는 능소화, 하고 불러본다/ 두 둔에 가물거리며 어떤 여자가 불려 나온다/ 누구였지 누구였더라/ 한번도 본 적 없는 아니 늘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던/ 여자가 나타났다…”

우리 산하에는 사시사철 꽃이 핀다. 들판 한구석, 이름 모를 골짜기에 피어 있는 들꽃은 보는 이에게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한다. 누가 돌보지 않아도, 수수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선 들꽃의 이미지는 생명력, 수수함 등으로 갈무리된다.

들꽃을 시문학과 연결해 에세이로 풀어낸 ‘들꽃 수업’은 향기로운 책이다. 국어교사였던 성모여고 심재신 교감은 생생한 감각과 인문학적 통찰을 토대로 들꽃의 다양한 면모를 담았다. 일상에서 다양한 들꽃을 만나왔던 저자는 들꽃의 고유한 미와 개성적인 특질을 표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작고 여린 들꽃들과 함께 길어 올린 삶과 자연, 문학 이야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책은 들꽃에 대한 아름다운 헌사다. 저자는 꽃에 대한 찬사에만 머물지 않고 이를 삶과 연계해 풀어낸다.

책에 등장하는 꽃은 다채롭다. 진달래꽃, 찔래꽃, 도라지꽃, 민들레, 난초, 창포, 원추리. 동백꽃, 구절초, 쑥부쟁이, 목련꽃, 수선화, 애기똥풀꽃, 작약, 제비꽃, 라일락 등 기억에 남아 있거나 나들이 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꽃들이다.

노랑꽃창포
산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라지꽃은 개화 전 흰색에서 청색으로 변한다. 부풀어 오른 모습 덕분에 ‘풍선꽃’으로도 불린다. 여름철 보라색과 유사한 별 모양의 꽃들로 들판은 푸른 별밭으로 변한다. 저자는 “수많은 사연을 품은 듯한 색을 지녔지만 맑은 모습”을 띄는 도라지꽃이 상처받아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를 닮았다고 본다.

‘여름 숲의 귀족’인 달개비꽃은 닭의장풀로도 불린다. 파란 꽃잎, 노란 수술, 흰 수술대, 암술대, 꽃받침은 귀족의 자태를 떠올리게 한다. 볏을 세운 장닭 같기도 하고 푸른 두건을 쓴 도련님 같은 이미지가 배어나온다. 저자는 “‘한국식물 이름의 유래’에서는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이나 ‘동의 보감’(東醫寶鑑)에서 줄기의 단면이 닭의 창자 같다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밝히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름도 다양한데 달개비, 닭개비, 달래개비, 닭의꼬꼬, 계장초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들국화 대표인 구절초는 일본에서는 ‘조선 들국화’라고 부른다. 백의민족의 상징성을 띄는 꽃이다. 음력 9월 9일 중양절 무렵은 줄기가 아홉 마디가 된다. 홀수가 두 개 겹치는 날이라 매우 길일이다. “성품이 맑아서 다른 들풀들과 함께 어울리긴 하지만” 한편으로 쉽게 어우러지지 않는다.

이밖에 ‘절망의 끝자락에 피는 꽃, 해국’, ‘풍성하고 아름다움 감각의 제국, 비파’, ‘첫사랑의 향기, 라일락’ 등 담담하면서도 다정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창비·1만8500원>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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