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민으로 살아가기] 취향저격 영화·옛 감성 물씬…“우린 광주극장과 연애중”
2024년 05월 29일(수) 08:30
(2) 광주극장을 지키는 사람들
멀티플렉스 시대 전국 유일 단관극장
인터넷 팬카페 회원 1만3300여명 활동
440명은 매월 1만원 이상 든든한 후원
청춘·연애·공부 등 저마다 추억 간직
“2035년 개관 100주년에도 함께 했으면”

영화 ‘버텨내고 존재하기’는 올해로 89년간 변함없는 얼굴로 관객들을 맞이했던 매표소, 상영관, 영사실, 사무실, 계단과 복도 등 극장의 오래된 공간들이 등장한다. 박태규 화백이 그린 ‘버텨내고 존재하기’의 손간판

전국 유일의 단관 극장인 광주극장은 자랑거리가 많다. 멀티플렉스의 공세 속에서도 꿋꿋히 버티고 있는 예술전용관이자 화가가 그린 정겨운 손간판을 만날 수 있어서다. 게다가 극장 입구에는 CGV 등 대형 복합상영관의 무인판매대 대신 유리창 매표소가 자리하고 있다.

취재차 갔던 날, 극장앞에 다다르자 박태규 화백이 직접 손간판이 가장 먼저 반긴다. 지난해 11월 광주극장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독립영화 ‘존재하고 버텨내기’의 한 장면이다.

광주극장이 숱한 세월 속에서도 버텨낼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관객’이다. 50여 년 동안 광주극장을 드나들며 추억의 갈피를 쌓아온 정애화(67)씨에서부터 멀티플렉스의 쾌적함 대신 오래된 극장의 불편함에 ‘빠진’ 20대 회사원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광주극장을 즐기는 후원자이다.

현재 광주극장을 사랑하는 이들은 ‘광주극장카페’에 가입된 회원 1만 3000여 명과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애호가들이다. 특히 1만원 이상의 후원비를 내는 회원 440명은 든든한 버팀목이다.

이날 기자와 만난 5명의 애호가는 김형수(55) 광주극장 전무이사가 연령과 직업 등을 고려해 ‘픽한’ 이들이다. 가장 연장자인 정애화(67)씨를 비롯해 정창호(44·회사원), 신조준한(32·초등학교 교사), 안소현(30·회사원), 박정수(29·문화기획자)씨는 광주극장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각자 다르지만 ‘공간’을 사랑하는 열정 만큼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이들 가운데 정애화씨는 광주극장의 홍보대사이다. ‘광주극장 영화를 사랑하고 노후에 그림책 작가가 꿈인 여행방랑자’로 자신을 소개한 정씨는 50여 년 동안 광주극장의 영화들을 보며 누구보다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단발머리 여고시절, 처음으로 광주극장에서 영화를 본 게 소중한 인연이 됐어요. 그때만 해도 월말 고사가 끝나면 한달에 한번 이곳에서 ‘십계’, ‘쿼바디스’ 등을 단체로 관람했거든요. 친구들과 객석에 앉아 본 스크린의 장면들은 지금도 생생해요. 제게 광주극장은 평생 옆에 두고 싶은 추억의 곳간 이예요. ”

정씨의 광주극장에 대한 애정은 잘 알려져 있다. 직장 다니느라 바쁜 시간에도 일주일에 2~3일은 극장을 찾는 등 지금껏 관람한 영화만 해도 수백 여편에 달한다. 많은 사람들이 극장을 찾도록 영화 전단지를 돌리고 단톡방에 좋은 영화를 소개하는 등 열혈 전도사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 2022년 광주극장 개관 87년을 맞아 열린 광주극장영화제 상판식에서는 20명의 시민이 작업한 19편 영화와 박태규 화백이 그린 개막작 손간판 2점이 내걸렸다.
초등학교 교사인 신조준환씨는 지난 2014년 미국영화 ‘그녀’(Her·71회 골든그로브 각본상 수상)를 상영하는 극장을 찾다가 광주극장과 만나게 된 케이스. 여자친구와 함께 도보로 5분 거리인 극장을 가기위해 구 시청사거리에서 택시를 탈 만큼 광주극장의 위치도 몰랐다. 하지만 오래된 공간에서 풍기는 편안한 매력에 매료돼 ‘그날’ 이후 광주극장의 팬이 됐다. ‘웃프게도’ 당시 영화를 함께 봤던 그녀와는 이별했지만 광주극장과는 오랜 연인으로 열애중이다.

“결정적으로 광주극장에 빠지게 된 건 2015년 영화 ‘윈터 슬립’(Winter Sleep)을 본 날이었어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기에 일부러 극장에 왔는 데 주변 관객이 상영 내내 소음을 내 집중하기 힘들어 중간에 나왔어요. 마침 김 이사가 왜 끝까지 안보고 가냐고 묻길래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티켓 한장을 주면서 다음에 다시 오라고 하더군요. 순간, 관객을 존중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대학 2학년때 예술극장과 멀티플렉스를 비교하는 교양수업에서 처음 광주극장을 알게 됐다는 박정수씨는 2015년 프랑스 영화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를 관람하면서 단골손님이 됐다. 자신의 전공인 시각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적인…’를 관람하고 싶었던 박씨는 당시 광주극장이 유일하게 이 영화를 상영해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광주극장을 아끼고 지키는 5명의 서포터즈가 지난달 중순 광주극장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맨 왼쪽부터 김형수 광주극장 전무이사, 박정수, 정애화, 안소현, 신조준환, 정창호씨.
“대다수 멀티플렉스는 소수의 인기영화들만 상영하고, 대중성이 없는 예술영화는 아예 스크린에 걸지 않거든요. 광주극장은 문화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꼭 지역에 있어야 할 소중한 보물이예요.”

박씨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안소현씨 역시 10년 전의 ‘그날’로 되돌아갔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는 박물관이나 광주극장 등 광주의 문화명소를 주제로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난생 처음 방문했던 광주극장에서 인생영화를 만났다.

“그전까지만 해도 광주극장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터라 상영중이었던 ‘시네마 천국’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거든요. 마치 영화의 주인공인 토토가 된 듯 극장을 나온 뒤에도 좀처럼 여운이 가시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그때부터 광주극장의 팬이 된 건 아니었다. 여느 대학생처럼 멀티플렉스 상영관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즐겨 관람했던 안씨는 대학 졸업후 다시 찾은 광주극장에서 손간판의 멋에 반해 ‘극장’이라는 공간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단골 고객이 됐다.

지난 2017년 광주극장에서 개봉된 영화 ‘옥자’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봉준호 감독과의 대화. <사진=광주극장 제공>
20대부터 이 곳을 드나들었던 정창호씨는 관객인지 직원이지 종종 헷갈리는, 자칭 광주극장을 사랑하는 지킴이다. 그도 그럴것이 전기 기술직이었던 그는 극장의 조명시설이나 복사기, 영화장비들이 고장이라도 나면 팔을 걷고 수리를 맡아서 했기 때문이다. 여유돈이 있으면 극장의 냉방시설이나 전기료에 보태고 싶을 정도다.

“광주극장은 다른 복합영화관에서는 상영하지 않는 영화들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예요. 인생이나 예술,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성 있는 영화들을 보고 있으며 저절로 주인공의 삶 속으로 녹아 드는 듯한 착각에 빠져요. 무엇보다 수동적인 관람이 아닌, 관객들에게 ‘생각거리’를 던져 주는 매우 흥미로운 공간이예요.”

관객과 극장의 관계는 일방형이 아닌, 쌍방형이다. 지난해 10월 열린 ‘광주극장 100년 관객 아카이브 프로젝트-고(故) 김용윤을 기억하다’가 그 예다. 광주극장에서 100편 이상의 영화를 본 관람객을 대상으로 기획한 것으로, 지난해 8월 세상을 떠난 광주극장 유일의 평생회원이었던 김씨를 추모하는 시간이었다.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이들에게는 공통된 버킷리스트가 있다. ‘햇볕이 드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이 이곳이 오래도록 곁에 남아 있는 것. 그리하여 개관 100주년인 2035년, 극장에 모여 ‘버텨내고 존재하기’를 다시 관람하는 것이다.

/글=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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