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격동의 현대사 넘어 지역민과 100년 신문 만든다
2024년 04월 17일(수) 19:30 가가
호남 최초 2015년 2만호 발행
현대사 족적 남긴 기획물 다양
광주일보 소장 5·18 필름·사진
진상조사위 전달 진실규명 앞장
3·1절 마라톤·호남예술제 등
지역 인재 육성 산실 자리매김
현대사 족적 남긴 기획물 다양
광주일보 소장 5·18 필름·사진
진상조사위 전달 진실규명 앞장
3·1절 마라톤·호남예술제 등
지역 인재 육성 산실 자리매김
호남 대표 일간지 광주일보가 올해로 창간 72주년을 맞았다.
광주일보는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론을 편다. 문화창달의 선봉에 선다. 지역개발의 기수가 된다’는 3대 사시(社是)를 걸고 역사의 기로에서 화두를 제시하고, 지역 사회의 흐름을 이끌었다.
6·25 전쟁과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88올림픽, IMF 외환위기, 한·일 월드컵,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세월호 참사,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코로나19 팬데믹 등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지역민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광주일보는 지난 2015년 5월 28일 지령(紙齡) 2만호를 발행하고 2022년 창간 70주년을 맞이하는 등 호남 지역 최초 기록을 나날이 갈아치우고 있다.
◇72년 호남의 역사를 기록=광주일보는 1952년 2월 11일 광주일보 전신인 ‘전남일보(全南日報)’라는 제호(題號)로 창간호를 발행하며 역사적인 첫 걸음을 뗐다.
광주일보의 또 다른 뿌리인 ‘전남매일신문’은 4·19혁명 직후인 1960년 9월 26일 창간호를 냈다.
옛 전남일보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 2개 면으로 제작돼 2000부 발행됐다. 제호는 한자 종서(縱書)로, 오른쪽 상단에 한국 지도의 바탕 위에 ‘전남일보(全南日報)’라고 썼다.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창간호의 1면은 대부분 판문점 휴전회담 기사로 채워졌다.
김남중 초대 사장을 비롯한 20여명의 사원들은 ‘대한통신전남공사’ 건물의 2층 비좁은 임시사무실에서 원고를 제작하고, 전용 인쇄공장이 없어 500여m 떨어진 인쇄공장까지 원고를 배달하며 갖은 설움을 겪었으나 공정한 보도, 신속정확한 보도사명을 위한 기자혼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억강부약’을 사명으로 정권의 잘못을 가차없이 지적하고 독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면서 독자 수는 일취월장 늘어났다. 창간 3개월여만에 창간호의 두 배가 넘는 5000부를 인쇄해 광주·전남 전역으로 배포했으며 금남로5가에 사옥을 마련하는 등 대약진을 했다.
독자들의 성원으로 사세도 날로 확장됐다. 1962년 12월 광주시 동구 금남로 1가 1번지로 사옥을 이전하면서 ‘금남로 시대’를 열었으며, 1968년 10월 9일 기존의 전남북 2도지(道紙)에서 전국지(全國紙)로 등록했다.
1963년 11월에는 취재전용 비행기 ‘무등산호’를 도입했으며, 1966년에는 1개월에 걸쳐 월남전 종군기자를 특파하기도 했다. 1969년 7월16일 지방지 최초로 컬러 신문 시대를 열고 종합매스컴센터를 구축했다.
옛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은 1980년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조치에 따라 ‘광주일보’ 제호 아래 하나가 됐다. 광주일보 창간일인 4월 20일은 옛 전남일보의 법인설립 등기일(4월 20일)에서 비롯됐다.
광주일보는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 가운데서도 ‘불편부당’의 뜻 아래 권력에 굴하지 않으며 민의를 대변했다.
3·15부정선거 당시 전남의 투표소 현장을 스케치하고 4·19 혁명의 시발점이 된 마산상고 학생 사망과 마산 시위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는 등 독재에 맞서 시민 의식을 고취시켰다.
언론 탄압이 극심했던 유신 정권이 긴급조치 1호를 내리자 광주일보는 1974년 10월 25일 기자 41명이 뜻을 모아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결의했다.
1980년 5·18 민중항쟁 당시에는 보도 내용을 일일이 계엄검열단에 허가를 맡아야 하는 등 탄압을 받았으나, 6월 2일 ‘아, 광주여’(옛 전남매일신문), ‘민주시민의 긍지, 무등산은 알고 있다’(옛 전남일보) 등 제목의 기사를 내 한 맺힌 지역민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신군부의 무력에 진실보도의 의무를 저버리고 광주의 참극을 낱낱이 알리지 못했던 기자들의 자책감과 반성은 ‘5·18 진상 규명’이라는 사명 아래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광주일보는 세월호 침몰 참사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 시위 등 역사적 현장뿐 아니라 광주시 동구 학동 참사, 서구 화정동 신축아파트 붕괴 사고, 서울 이태원 참사 등 재난 현장, 코로나19 팬데믹에 이어 의대 정원 증원으로 인한 의료대란까지 시민들의 곁에서 아픔에 공감하고 현장을 글과 사진으로 남겼다.
◇지역민의 염원 담은 캠페인 주도=광주일보는 지역민을 위한 다양한 캠페인을 벌여 지역발전의 목소리를 이끌었다. 현대사를 바로 세우고 시대변화를 앞서나가는 기획보도와 캠페인을 통해 사회 공기(公器)로서의 소임과 책임을 다하기 위함이었다.
4·19혁명 이후 5일만에 희생자 유가족 돕기운동을 벌여 주의금과 위문금품 모금운동을 펼쳤으며, 맹인을 위한 개안운동, 파월장병에 신문 보내기 캠페인, 광주학생회관 건립 캠페인 등을 잇따라 추진했다. 1969년에는 어린이의 안전한 등·하교를 위해 ‘학교 앞 육교를 세워주자’는 캠페인을 벌여 광주 최초의 육교 ‘중앙육교’를 세웠다.
1975년부터 ‘도립공원 1번지 무등산 정원화를 위한 범시민 캠페인’, ‘무등산 나무심기 캠페인’, ‘무등산을 살리자’, ‘무등산 정상 개방’ 등 무등산 가꾸기 운동에 앞장섰다.
1988년부터는 ‘무등산 정상 개방’ 캠페인을 벌여 1966년부터 군사시설로서 출입이 통제된 서석대, 입석대, 천왕봉 등 정상 일대를 시민에게 개방하라는 여론을 이끌었다. 이를 통해 1990년 서석대와 입석대가 상시 개방되는 성과를 이뤘다.
5·18 진상 규명에도 힘썼다. 지난 2022년 광주일보는 소장 중이던 1980년 5월 당시 촬영된 필름 및 사진 자료 3600장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전달했다. 이 중 1980년 5월 21일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 장갑차에 실린 12.7㎜ 기관총에 실탄이 장전된 사진도 포함됐는데, 이는 “21일 오전까지는 계엄군에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계엄군 측 주장을 반박하는 최초의 사진 증거 자료가 됐다.
같은 해 광주일보는 5·18기록관과 업무협약을 맺고 1975~2002년 광주일보 신문 기록물을 5·18민주화운동 관련 통합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사업을 위해 기증했다. 이로써 일반 시민들과 연구자들이 광주일보에 기록된 5·18 당시 생생한 현장기록과 5·18 관련 특집기사 등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이밖에도 광주일보는 마을문고 도서보내기 운동, 남도학숙 캠페인, 재소련 한글학숙설립 캠페인, ‘북녘 동포에 경운기 보내기’, 상무대 반환운동, 5·18국립묘지 민주나무 헌수운동 등을 통해 지역발전에 힘써왔다.
◇역사를 넘어 미래를 그리는 기획=광주일보는 현대사 대사건을 파헤치고 남도 산야와 풍물을 소개하는 지리지 등 다양한 기획 연재물을 통해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비추고 미래를 제시했다.
광주일보는 4·19 혁명이 발생한지 4일만인 1960년 4월 23일부터 ‘광주학생 4·19 발자취’ 기획물을 연재해 4·19 전개 과정과 뒷 이야기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1980년에는 언론 통폐합 조치 이후 첫 대형기획연재물로 ‘영산강을 살리자’를 45회 연재, 제5공화국 들어 심리적 절망에 빠진 지역민들을 위해 영산강 개발을 지역 발전의 계기로 삼자는 목소리로 관심을 이끌어냈다.
1989년에는 5·18의 실상과 광주시민들의 아픔을 기록한 ‘5·18…9년’을 총 47회 연재했다. 이는 광주시민이 겪어온 정신·육체적 고통,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광주의 자부심을 다각도로 조명해 5·18 진상 규명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수백회씩 연재한 대형 기획연재로 한국 신문사에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지난 1973년 9월 1일부터 1975년 8월 15일까지 이어진 ‘광복 30년’(553회), 1975년 12월 1일부터 1977년 7월 21일까지 연재된 ‘의병열전’(439회) 등이다.
1981년 4월부터 1982년 11월까지는 광주일보 최초의 여성 기획물 ‘여인도’를 총 205회 연재했다. 한국 여성들의 생활상을 혼인제도, 가사노동, 교육, 이혼 등 각 분야로 나눠 삼국시대·고려·조선의 풍습과 변천을 살펴보고 현대에서 변화한 모습, 내재된 갈등 등을 묘사해 인기를 끌었다.
이밖에도 세월호 침몰 참사와 학동 참사, 화정동 아이파크 붕괴 사고, 이태원 참사 등 재난 현장에서 안전불감증 등 세태를 지적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제시하는 기획물을 썼다.
◇호남 문화 창달을 선도=광주일보는 ‘예향’ 광주에 걸맞는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와 기획 보도를 주도해 지역민의 삶의 질 향상에도 힘써왔다.
올해로 69회를 맞는 광주일보 주최 ‘호남예술제’가 대표적이다. 창사 3년째인 1956년부터 시작된 호남예술제는 5·16군사정변, 5·18민중항쟁 등 소용돌이 속에서도 중단되지 않고 맥을 이어와 지금도 지역 문화예술계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예술 꿈나무들의 등용문으로 꼽힌다.
광주일보는 광주지역 최초의 사설공립도서관인 남봉도서관(옛 전일도서관)을 개관하고 광주 최초 사설미술관인 남봉미술관(옛 전일미술관)을 열어 지역민에게 문화·예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지난 2013년에는 창간 61주년을 맞아 문화예술잡지 ‘예향’을 복간, 21세기 새로운 문화 트렌드와 콘텐츠를 소개하며 지역 내 수준 높은 문화 예술 담론을 펼치고 소통하는 역할을 주도하고 있다.
또 3·1절 전국마라톤대회 등 다양한 문화·예술·체육행사를 통해 지역 인재들을 길러내고 있으며 ‘리더스 아카데미’를 개설해 지역의 지도자들이 지역 발전을 위해 아이디어와 역량을 모으고 있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광주일보는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론을 편다. 문화창달의 선봉에 선다. 지역개발의 기수가 된다’는 3대 사시(社是)를 걸고 역사의 기로에서 화두를 제시하고, 지역 사회의 흐름을 이끌었다.
광주일보는 지난 2015년 5월 28일 지령(紙齡) 2만호를 발행하고 2022년 창간 70주년을 맞이하는 등 호남 지역 최초 기록을 나날이 갈아치우고 있다.
◇72년 호남의 역사를 기록=광주일보는 1952년 2월 11일 광주일보 전신인 ‘전남일보(全南日報)’라는 제호(題號)로 창간호를 발행하며 역사적인 첫 걸음을 뗐다.
옛 전남일보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 2개 면으로 제작돼 2000부 발행됐다. 제호는 한자 종서(縱書)로, 오른쪽 상단에 한국 지도의 바탕 위에 ‘전남일보(全南日報)’라고 썼다.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창간호의 1면은 대부분 판문점 휴전회담 기사로 채워졌다.
‘억강부약’을 사명으로 정권의 잘못을 가차없이 지적하고 독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면서 독자 수는 일취월장 늘어났다. 창간 3개월여만에 창간호의 두 배가 넘는 5000부를 인쇄해 광주·전남 전역으로 배포했으며 금남로5가에 사옥을 마련하는 등 대약진을 했다.
독자들의 성원으로 사세도 날로 확장됐다. 1962년 12월 광주시 동구 금남로 1가 1번지로 사옥을 이전하면서 ‘금남로 시대’를 열었으며, 1968년 10월 9일 기존의 전남북 2도지(道紙)에서 전국지(全國紙)로 등록했다.
1963년 11월에는 취재전용 비행기 ‘무등산호’를 도입했으며, 1966년에는 1개월에 걸쳐 월남전 종군기자를 특파하기도 했다. 1969년 7월16일 지방지 최초로 컬러 신문 시대를 열고 종합매스컴센터를 구축했다.
옛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은 1980년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조치에 따라 ‘광주일보’ 제호 아래 하나가 됐다. 광주일보 창간일인 4월 20일은 옛 전남일보의 법인설립 등기일(4월 20일)에서 비롯됐다.
광주일보는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 가운데서도 ‘불편부당’의 뜻 아래 권력에 굴하지 않으며 민의를 대변했다.
3·15부정선거 당시 전남의 투표소 현장을 스케치하고 4·19 혁명의 시발점이 된 마산상고 학생 사망과 마산 시위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는 등 독재에 맞서 시민 의식을 고취시켰다.
언론 탄압이 극심했던 유신 정권이 긴급조치 1호를 내리자 광주일보는 1974년 10월 25일 기자 41명이 뜻을 모아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결의했다.
1980년 5·18 민중항쟁 당시에는 보도 내용을 일일이 계엄검열단에 허가를 맡아야 하는 등 탄압을 받았으나, 6월 2일 ‘아, 광주여’(옛 전남매일신문), ‘민주시민의 긍지, 무등산은 알고 있다’(옛 전남일보) 등 제목의 기사를 내 한 맺힌 지역민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신군부의 무력에 진실보도의 의무를 저버리고 광주의 참극을 낱낱이 알리지 못했던 기자들의 자책감과 반성은 ‘5·18 진상 규명’이라는 사명 아래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광주일보는 세월호 침몰 참사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 시위 등 역사적 현장뿐 아니라 광주시 동구 학동 참사, 서구 화정동 신축아파트 붕괴 사고, 서울 이태원 참사 등 재난 현장, 코로나19 팬데믹에 이어 의대 정원 증원으로 인한 의료대란까지 시민들의 곁에서 아픔에 공감하고 현장을 글과 사진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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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12월 1일 김종태 전 사장 등이 걸고 있는 광주일보사 현판. <광주일보 자료사진> |
4·19혁명 이후 5일만에 희생자 유가족 돕기운동을 벌여 주의금과 위문금품 모금운동을 펼쳤으며, 맹인을 위한 개안운동, 파월장병에 신문 보내기 캠페인, 광주학생회관 건립 캠페인 등을 잇따라 추진했다. 1969년에는 어린이의 안전한 등·하교를 위해 ‘학교 앞 육교를 세워주자’는 캠페인을 벌여 광주 최초의 육교 ‘중앙육교’를 세웠다.
1975년부터 ‘도립공원 1번지 무등산 정원화를 위한 범시민 캠페인’, ‘무등산 나무심기 캠페인’, ‘무등산을 살리자’, ‘무등산 정상 개방’ 등 무등산 가꾸기 운동에 앞장섰다.
1988년부터는 ‘무등산 정상 개방’ 캠페인을 벌여 1966년부터 군사시설로서 출입이 통제된 서석대, 입석대, 천왕봉 등 정상 일대를 시민에게 개방하라는 여론을 이끌었다. 이를 통해 1990년 서석대와 입석대가 상시 개방되는 성과를 이뤘다.
5·18 진상 규명에도 힘썼다. 지난 2022년 광주일보는 소장 중이던 1980년 5월 당시 촬영된 필름 및 사진 자료 3600장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전달했다. 이 중 1980년 5월 21일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 장갑차에 실린 12.7㎜ 기관총에 실탄이 장전된 사진도 포함됐는데, 이는 “21일 오전까지는 계엄군에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계엄군 측 주장을 반박하는 최초의 사진 증거 자료가 됐다.
같은 해 광주일보는 5·18기록관과 업무협약을 맺고 1975~2002년 광주일보 신문 기록물을 5·18민주화운동 관련 통합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사업을 위해 기증했다. 이로써 일반 시민들과 연구자들이 광주일보에 기록된 5·18 당시 생생한 현장기록과 5·18 관련 특집기사 등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이밖에도 광주일보는 마을문고 도서보내기 운동, 남도학숙 캠페인, 재소련 한글학숙설립 캠페인, ‘북녘 동포에 경운기 보내기’, 상무대 반환운동, 5·18국립묘지 민주나무 헌수운동 등을 통해 지역발전에 힘써왔다.
◇역사를 넘어 미래를 그리는 기획=광주일보는 현대사 대사건을 파헤치고 남도 산야와 풍물을 소개하는 지리지 등 다양한 기획 연재물을 통해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비추고 미래를 제시했다.
광주일보는 4·19 혁명이 발생한지 4일만인 1960년 4월 23일부터 ‘광주학생 4·19 발자취’ 기획물을 연재해 4·19 전개 과정과 뒷 이야기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1980년에는 언론 통폐합 조치 이후 첫 대형기획연재물로 ‘영산강을 살리자’를 45회 연재, 제5공화국 들어 심리적 절망에 빠진 지역민들을 위해 영산강 개발을 지역 발전의 계기로 삼자는 목소리로 관심을 이끌어냈다.
1989년에는 5·18의 실상과 광주시민들의 아픔을 기록한 ‘5·18…9년’을 총 47회 연재했다. 이는 광주시민이 겪어온 정신·육체적 고통,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광주의 자부심을 다각도로 조명해 5·18 진상 규명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수백회씩 연재한 대형 기획연재로 한국 신문사에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지난 1973년 9월 1일부터 1975년 8월 15일까지 이어진 ‘광복 30년’(553회), 1975년 12월 1일부터 1977년 7월 21일까지 연재된 ‘의병열전’(439회) 등이다.
1981년 4월부터 1982년 11월까지는 광주일보 최초의 여성 기획물 ‘여인도’를 총 205회 연재했다. 한국 여성들의 생활상을 혼인제도, 가사노동, 교육, 이혼 등 각 분야로 나눠 삼국시대·고려·조선의 풍습과 변천을 살펴보고 현대에서 변화한 모습, 내재된 갈등 등을 묘사해 인기를 끌었다.
이밖에도 세월호 침몰 참사와 학동 참사, 화정동 아이파크 붕괴 사고, 이태원 참사 등 재난 현장에서 안전불감증 등 세태를 지적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제시하는 기획물을 썼다.
◇호남 문화 창달을 선도=광주일보는 ‘예향’ 광주에 걸맞는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와 기획 보도를 주도해 지역민의 삶의 질 향상에도 힘써왔다.
올해로 69회를 맞는 광주일보 주최 ‘호남예술제’가 대표적이다. 창사 3년째인 1956년부터 시작된 호남예술제는 5·16군사정변, 5·18민중항쟁 등 소용돌이 속에서도 중단되지 않고 맥을 이어와 지금도 지역 문화예술계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예술 꿈나무들의 등용문으로 꼽힌다.
광주일보는 광주지역 최초의 사설공립도서관인 남봉도서관(옛 전일도서관)을 개관하고 광주 최초 사설미술관인 남봉미술관(옛 전일미술관)을 열어 지역민에게 문화·예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지난 2013년에는 창간 61주년을 맞아 문화예술잡지 ‘예향’을 복간, 21세기 새로운 문화 트렌드와 콘텐츠를 소개하며 지역 내 수준 높은 문화 예술 담론을 펼치고 소통하는 역할을 주도하고 있다.
또 3·1절 전국마라톤대회 등 다양한 문화·예술·체육행사를 통해 지역 인재들을 길러내고 있으며 ‘리더스 아카데미’를 개설해 지역의 지도자들이 지역 발전을 위해 아이디어와 역량을 모으고 있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