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 부르지 말자 - 박행순 전남대 명예교수
2024년 01월 24일(수) 00:00 가가
전 세계적으로 자살은 심각한 문제이고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우리에게는 저출산과 함께 자살은 대단히 중대한 사회문제이다. 특히 작년에는 여러 선생님들이 학교 안팎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때마다 언론에서는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써서 사건을 보도하였다.
2004년에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자살예방협회가 ‘자살’이란 용어를 헤드라인에 쓰거나, 사인을 자살로 밝히는 것을 피하라고 권고하였다. ‘자살’이라는 단어의 섬뜩한 어감과 모방행위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언론에서는 자살의 대체어로 ‘극단적 선택’을 사용하고 있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난 20년간 써 온 ‘극단적 선택’은 합리적이고 적절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언어의 오용임을 지적하고 싶다. 왜냐하면 ‘선택’의 범주에 포함된 자살이 마치 인간의 권리, 또는 개인의 자유인 듯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의 2022년도 자살예방백서에서는 또 다른 표현으로 ‘고의적 자해(자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고의적 자해는 범위가 다양하고 모든 자해가 자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이 역시 바른 대체어 또는 동의어는 아니다.
정신과 의사인 나종오씨가 그의 저서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에서 “자살은 극단적 선택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SNS에 올리자 조회 수가 30만을 넘었고 정신의학신문에도 게재하였으나 변한 것은 별로 없었다고 회고한다. 자살을 선택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고인과 유가족들을 낙인찍는 일이며 자살 유족들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은 고인이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 묻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자살을 ‘자살’이라고 떳떳하게 말 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지 않는 이상,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고 강변한다.
울산지방법원의 ‘자살방조미수’라는 판결문(2019년 12월 4일자)에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자살이라는 이 비극적 결과를 방지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이 사건의 상세한 사정을 부기해 둔다”라며 장문의 선고문을 적는 이유를 밝힌다. 일면식도 없던 피고인들이 자살을 모의하면서 나누는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진심어린 대화들, 죽음을 위해서 비로소 소통하고 동행하는 모습이 참으로 역설적이고 눈물겹다.
필자가 이 선고문을 언급하는 이유는 피고인의 객관적 범죄보다는 그들의 내면을 헤아리는 재판관의 심안뿐 아니라 ‘자살’이라는 단어가 피고인들 간의 대화에서, 그리고 법정용어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는 사실을 환기하고자 함이다.
다행히 작년에 정부차원에서, 그리고 신문과 방송에서 이 주제를 논하기 시작하였다.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의 자살위기극복 특별위원회에서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을 자제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차라리 자살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쓰되, 되도록 자극적 보도를 지양하자 하고, 한겨레21에서는 “자살을 ‘선택’이라 표현한 ‘극단적 선택’을 써야할까?”라며 회의적 태도를 보인다. 반면에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대해 ‘극단적 선택’이 아닌 ‘자살’로 표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오랫동안 금기시하던 그 단어를 이제 와서 적극적으로 소환하여 사용한다고 자살 예방이나 문제 해결에 어떤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극단적 선택’에 대한 반대 의견들이 물꼬를 튼 마당에 전체 언론이 속히 합류함으로써 새해에는 이 잘못된 표현이 사라지기를 기대한다.
대안으로는 적절한 대체어가 나오기 까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자살이라는 단어를 쓰고 그 외에는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목숨을 끊었다, 또는 생을 마감했다” 등의 일상에서 쓰는 언어를 쓰고, 법정 용어와 정부 차원의 문건에서는 ‘극단적 자해(자살)’로 표기하는 것을 제안한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난 20년간 써 온 ‘극단적 선택’은 합리적이고 적절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언어의 오용임을 지적하고 싶다. 왜냐하면 ‘선택’의 범주에 포함된 자살이 마치 인간의 권리, 또는 개인의 자유인 듯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울산지방법원의 ‘자살방조미수’라는 판결문(2019년 12월 4일자)에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자살이라는 이 비극적 결과를 방지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이 사건의 상세한 사정을 부기해 둔다”라며 장문의 선고문을 적는 이유를 밝힌다. 일면식도 없던 피고인들이 자살을 모의하면서 나누는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진심어린 대화들, 죽음을 위해서 비로소 소통하고 동행하는 모습이 참으로 역설적이고 눈물겹다.
필자가 이 선고문을 언급하는 이유는 피고인의 객관적 범죄보다는 그들의 내면을 헤아리는 재판관의 심안뿐 아니라 ‘자살’이라는 단어가 피고인들 간의 대화에서, 그리고 법정용어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는 사실을 환기하고자 함이다.
다행히 작년에 정부차원에서, 그리고 신문과 방송에서 이 주제를 논하기 시작하였다.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의 자살위기극복 특별위원회에서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을 자제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차라리 자살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쓰되, 되도록 자극적 보도를 지양하자 하고, 한겨레21에서는 “자살을 ‘선택’이라 표현한 ‘극단적 선택’을 써야할까?”라며 회의적 태도를 보인다. 반면에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대해 ‘극단적 선택’이 아닌 ‘자살’로 표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오랫동안 금기시하던 그 단어를 이제 와서 적극적으로 소환하여 사용한다고 자살 예방이나 문제 해결에 어떤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극단적 선택’에 대한 반대 의견들이 물꼬를 튼 마당에 전체 언론이 속히 합류함으로써 새해에는 이 잘못된 표현이 사라지기를 기대한다.
대안으로는 적절한 대체어가 나오기 까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자살이라는 단어를 쓰고 그 외에는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목숨을 끊었다, 또는 생을 마감했다” 등의 일상에서 쓰는 언어를 쓰고, 법정 용어와 정부 차원의 문건에서는 ‘극단적 자해(자살)’로 표기하는 것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