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지역사회 상·하 - 박찬승 지음
2023년 09월 01일(금) 09:00
근·현대 150년 전남 지역사회 변천사
“…남쪽으로는 즐비한 일인(日人)의 기와집이오, 중앙으로는 초가에 부자들의 옛 기와집이 섞여 있고, 동북으로는 수림(樹林) 중에 서양인의 집과 남녀 학교와 예배당이 솟아 있는 외에 몇 개의 집을 내놓고는 땅에 붙은 초가집이다. 다시 건너편 유달산 밑을 보자. 집은 돌 틈에 구멍만 빤히 뚫어진 돼지막같은 초막들이 산을 덮어 완전한 빈민굴이다.”

목포 출신 소설가 박화성(1903~1988)은 등단작인 ‘추석전야’(1925년)에서 당시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과 조선인 거주지인 북촌의 모습을 ‘일인 기와집’과 ‘돼지막같은 초막’으로 대비시킨다. 일본 식민지배기인 1920년대 목포 북촌은 주택문제뿐만 아니라 식수, 의료 등 여러 면에서 의도적인 차별을 받았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신간 ‘혼돈의 지역사회’에서 식민기 목포를 비롯해 인천, 군산 등 과거 개항장 도시들이 전통도시와 근대도시가 공존하는 ‘이중 도시’(Dual City)로 건설됐다고 말한다. 저자는 “식민지 권력은 외래 식민 집단의 주거지를 토착민들의 열악한 주거공간과 분리시켜,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주거지로 만들어 식민권력의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고, ‘문명’에 의한 지배의 정당성을 선전하고자 했다”면서 “식민지 조선에서 이중도시는 일제 식민권력의 의도적인 정치적 기획의 산물로서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저자는 신간에서 식민-해방-남북분단-한국전쟁 기간 동안 전남지역 목포와 나주, 영광, 강진, 능주의 사회사를 살핀다. 1990년대부터 30여년에 걸쳐 문헌자료와 신문자료, 현지조사, 구술채록 등을 통해 5곳 지역사회 변동을 두 권의 저서에 꼼꼼하게 정리·분석한 결과물이다. 이 책은 한국 근·현대사 150년 세월동안 지역사회가 어떠한 변동을 보였는지, 그리고 지역유력자(지도자)가 어떻게 바뀌어 갔는가에 중점을 둔다.

목포시 근대 역사문화공간 일원에서 열리는 ‘목포명물 옥단이! 잔칫집으로 마실가다!’프로그램. <목포시 제공>
저자는 ‘도론’(導論)에서 조선시대 전통적인 지역사회가 오늘날의 지역사회 모습으로 바뀌기까지 ▲지역사회의 근대적, 식민지적 재편과정의 시기(갑오개혁~식민지시대 신분제가 무너지고 지방행정 제도가 크게 바뀜) ▲해방-분단-전쟁으로 이어지는 ‘지역사회의 냉전적 재편과정의 시기’ ▲농지개혁-산업화-이농으로 이어지는 ‘지역사회의 자본주의적 재편과정의 시기’ 등 3차례의 격변기가 있었다고 밝힌다. 또한 지역사회의 새로운 리더십 형성에 초점을 맞춘다. 식민기 새롭게 등장한 ‘지역 엘리트’는 지역에서 가장 먼저 신교육을 받은 향리가(鄕吏家) 자제들이다. 이들 일부는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한 반면 많은 이들은 일제지배에 저항하며 1930년대 각 지역에서 민족·사회운동을 이끄는 세력의 주축을 이뤘다.

저자는 크게 ‘식민기 지역사회와 민족·사회운동’과 ‘해방·분단·전쟁기 지역사회’로 나눠 각 지역의 역사흐름을 살핀다. 신간에 실린 5개 지역의 식민-해방-남북분단-한국전쟁기 사회사는 교과서에서 접하지 못한 새로운 것들이다. ‘지역 나름의 역사위에서, 지역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저자의 학문적인 자세는 자칫 망각해버릴 수 있는 지역사를 생생하게 살려낸다.

이제껏 잘 알지 못했던 근·현대 전남 지역사는 역동적이지만 이면에는 지역의 갈등과 깊은 상처를 감추고 있기도 하다. 영광의 경우 한국전쟁 기간 중 좌·우익 학살로 민간인 2만 5000명 이상이 희생됐다. 당시 영광 전체인구의 18%, 전남지역 희생자의 50%를 차지한다. 이러한 식민기와 한국전쟁기의 지역사는 현재의 역사와 이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식민-해방-남북분단-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지역사에 오늘의 갈등을 풀 열쇠가 있다. 우리가 ‘혼돈의 지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양대출판부·각 권 3만2000원>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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