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차는 어디로 갑니까’ 젊은 시인의 ‘5·18 悲歌’
2023년 08월 08일(화) 21:05 가가
광주 출신 오성인 두 번째 시집
오월 상흔·소외된 이웃 담아
“광주는 슬픔의 발원이자 시의 본령”
오월 상흔·소외된 이웃 담아
“광주는 슬픔의 발원이자 시의 본령”
“남도만이 가지는 고유한 정서와 문화를 제 나름의 호흡과 감각으로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광주는 단순한 생활공간이 아닌, 비극과 슬픔의 발원지이자 제 시의 본령이라 할 수 있어요.”
광주 출신 오성인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은 오월의 상흔을 대면하는 일이다. 그는 “광주를 말하지 않고서 시를 쓸 수 없다”고 했다.
80년 오월의 세대도 아니고 젊은 시인이 광주를 주요 모티브로 시를 쓰는 것은 그럴 만한 사유가 있다. 그에게 광주는 ‘극심한 사회 모순과 비극의 역사’를 논하기에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와 같은 도시다.
오성인 시인은 세상의 시류에 맞추지 않고 성실하고 진중하게 자신만의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느린 듯 하지만 뚜벅뚜벅 자신만의 작품을 쓰고 있는 오 시인이 최근 두 번째 시집 ‘이 차는 어디로 갑니까’(걷는 사람)를 펴냈다.
발간 소식을 전해오는 시인은 여전히 성실한 청년 문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적잖은 상처들이 깃들어 있다. 그 상처는 시인 자신의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로부터 연유된 것도 있다.
이번 시집에 무려 ‘아버지’라는 시어가 구십 여 차례 등장한다. 시인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아버지는 1군단 본부대 수송부에서 운전병으로 복무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휘부로부터 ‘부대 근처 야산에 있는 나무를 벌목해 오라’는 지침이 떨어졌다 합니다. 아버지와 부대원들은 명령에 따라 대량의 나무(박달나무)를 베어 부대로 옮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깎고 다듬고 옻칠해 군용트럭에 적재했어요. 며칠 뒤 ‘충정봉’으로 명명된 이 진압봉은 민주화운동 진압을 위해 광주에 내려와 있던 3, 7, 11공수부대에 지급됩니다.”
당시 ‘충정봉’은 무고한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살인도구’로 쓰이게 된다.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안 그의 아버지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빠졌다 한다. 당신 스스로를 ‘죽은 사람’으로 자칭했다는 것이다. ‘뼈에 사무친 말’이라는 작품이 그런 아버지의 심상을 대변한다.
“어디를 가서 어떤 장소가 되었든 누구를/ 만나게 되거든// 나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로 꺼내지 말아라/ 숨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다 나는/ 죽었다는 말이다”
한편으로 시인은 시를 쓰면서 “아버지의 시간이되 동시에 저의 이야기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시의 화자에 자신의 목소리를 담으려 했던 것은 그런 연유일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 작중 화자 대부분은 과거인 유년과 현재인 성년을 오가며 증언을 하고 대화를 청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시에 제 목소리를 투영하지 않으면 자칫 타성에 젖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지요.”
“나는 얼굴에서 이름보다/ 죄책감이 먼저 읽히는 사람”(‘오해’)라는 고백에서 보듯 시인 역시 아버지처럼 내내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오늘날 비극의 역사 중심 이면에 ‘광주’가 있다는 것을 아프게 인지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시인은 피폐해진 도시와 사람을 주목하기도 한다. 깊은 상처를 지니고도 존엄을 훼손하지 않으며 성장하는 인간을 응시한다. 울분과 슬픔은 ‘나누어’ 가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들려준다. 시 ‘매미’에서 “모든 그늘은 누군가 울다 간 흔적”이라는 표현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예의를 전제로 한다.
시인은 창작활동을 병행하는 틈틈이 문학강연을 하거나 고교 백일장 심사, 지역 도서관 올해의 책 심사 등을 하며 창작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읽고 쓰는 일의 무한 반복”이라는 표현대로 일상에서 글 쓰는 일을 지속하고 있다.
오롯이 시를 쓰며 사는 일은 분명 버거울 것이다. 그러나 심지 굳은 이 젊은 시인은 한눈 팔지 않고 시의 길을 향해 직진하고 있다. 그에게 ‘시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온다.
“역사 앞에 조금이라도 덜 부끄럽게 해주고 ‘제 자신을 제 자신답게’ 이끌고 질책하는 구원입니다. 물론 타인의 상처와 슬픔을 이해하는 ‘최선의 연대’ 방식이기도 하구요.”
한편 오 시인은 2013년 ‘시인수첩’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 ‘푸른 눈의 목격자’를 발간했다. 대산창작기금과 나주문학상을 수상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광주 출신 오성인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은 오월의 상흔을 대면하는 일이다. 그는 “광주를 말하지 않고서 시를 쓸 수 없다”고 했다.
오성인 시인은 세상의 시류에 맞추지 않고 성실하고 진중하게 자신만의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느린 듯 하지만 뚜벅뚜벅 자신만의 작품을 쓰고 있는 오 시인이 최근 두 번째 시집 ‘이 차는 어디로 갑니까’(걷는 사람)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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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아버지는 1군단 본부대 수송부에서 운전병으로 복무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휘부로부터 ‘부대 근처 야산에 있는 나무를 벌목해 오라’는 지침이 떨어졌다 합니다. 아버지와 부대원들은 명령에 따라 대량의 나무(박달나무)를 베어 부대로 옮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깎고 다듬고 옻칠해 군용트럭에 적재했어요. 며칠 뒤 ‘충정봉’으로 명명된 이 진압봉은 민주화운동 진압을 위해 광주에 내려와 있던 3, 7, 11공수부대에 지급됩니다.”
당시 ‘충정봉’은 무고한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살인도구’로 쓰이게 된다.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안 그의 아버지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빠졌다 한다. 당신 스스로를 ‘죽은 사람’으로 자칭했다는 것이다. ‘뼈에 사무친 말’이라는 작품이 그런 아버지의 심상을 대변한다.
“어디를 가서 어떤 장소가 되었든 누구를/ 만나게 되거든// 나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로 꺼내지 말아라/ 숨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다 나는/ 죽었다는 말이다”
한편으로 시인은 시를 쓰면서 “아버지의 시간이되 동시에 저의 이야기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시의 화자에 자신의 목소리를 담으려 했던 것은 그런 연유일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 작중 화자 대부분은 과거인 유년과 현재인 성년을 오가며 증언을 하고 대화를 청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시에 제 목소리를 투영하지 않으면 자칫 타성에 젖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지요.”
“나는 얼굴에서 이름보다/ 죄책감이 먼저 읽히는 사람”(‘오해’)라는 고백에서 보듯 시인 역시 아버지처럼 내내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오늘날 비극의 역사 중심 이면에 ‘광주’가 있다는 것을 아프게 인지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시인은 피폐해진 도시와 사람을 주목하기도 한다. 깊은 상처를 지니고도 존엄을 훼손하지 않으며 성장하는 인간을 응시한다. 울분과 슬픔은 ‘나누어’ 가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들려준다. 시 ‘매미’에서 “모든 그늘은 누군가 울다 간 흔적”이라는 표현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예의를 전제로 한다.
시인은 창작활동을 병행하는 틈틈이 문학강연을 하거나 고교 백일장 심사, 지역 도서관 올해의 책 심사 등을 하며 창작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읽고 쓰는 일의 무한 반복”이라는 표현대로 일상에서 글 쓰는 일을 지속하고 있다.
오롯이 시를 쓰며 사는 일은 분명 버거울 것이다. 그러나 심지 굳은 이 젊은 시인은 한눈 팔지 않고 시의 길을 향해 직진하고 있다. 그에게 ‘시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온다.
“역사 앞에 조금이라도 덜 부끄럽게 해주고 ‘제 자신을 제 자신답게’ 이끌고 질책하는 구원입니다. 물론 타인의 상처와 슬픔을 이해하는 ‘최선의 연대’ 방식이기도 하구요.”
한편 오 시인은 2013년 ‘시인수첩’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 ‘푸른 눈의 목격자’를 발간했다. 대산창작기금과 나주문학상을 수상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