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불확실성의 시간을 건너기 위하여 -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3년 07월 03일(월) 00:00 가가
지금,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불확실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지 않아서,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다른 가능성과 시도의 기회에 도전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확정되지 않아서 오히려 개인의 의지와 열정이 더 빛을 발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이는 기분 좋은, 삶에 대한 생산적인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긍정의 불확실성이다. 또 다른 불확실성은 개인의 의지와 노력을 무력화하는 악성 불확실성이다.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열심히’ 애를 쓰는 것을 비웃듯이 앞을 가로막는 불확실성이다. 이제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표현도 모자라서 초불확실성을 말하는 지경이다. 불확실성이라는 표현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학자 갤브레이스에 의하면 불확실성의 시대는 “사회를 주도하는 지도 원리가 사라진 시대”다. 사회를 주도하는 지도 원리란 개인의 삶에서도 방향성을 제시하는 근본과 바탕이 되는 조건이다. 지도 원리의 붕괴는 “합리와 진리, 담론 체계가 무너져 혼란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어제보다 오늘 더 불확실해진 삶을 견뎌야 한다면 누구나 불행할 수밖에 없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현실의 불확실한 상황들과 싸우면서 하나씩 이겨나간다는 말과 같은 것이 아니던가. 이런 이유에서 불확실성이 여전하다면, 그만큼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은 없다. 여기서의 불확실성은 개인의 실존적 불확실성이 아니고, 사회적 관계와 구조 속에서 엄습해 오는 총체적이며 일상적인 불확실성이다.
잘 드러나지 않은 문제의 이면에 ‘조직화된 무책임’이 있을 때 겪는 상처와 고통은 회복되기 어렵게 심각해진다. 조직화된 무책임은 ‘서로에게 책임을 계속 전가하는 조직적 형태’로, 희생자가 되는 것은 자기 책임이며 불운이라며, 개인들의 삶과 희망에 모든 책임이 넘겨진다. 나가서 조직화된 무책임의 언어가 어제까지의 판단 기준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선언하며, 심지어는 게으르고 악하며 위험한 것으로 규정하면, 그 고통은 감히 짐작조차 어렵다. 이렇게 커지는 미래의 불확실성은 직접 당사자에게만이 아니고 모두에게 심한 불안, 공포, 혼란을 확산한다. 개인이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적을수록, 자신의 삶이 외부로부터 규정될수록 일상의 악성 불확실성은 커지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의 심각성은 경제 영역에 한정되지 않으며 그렇게 해결될 수도 없다. 불확실성이 모두에게 똑같이 ‘공정하고 민주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계층과 성별과 학력, 세대에 따라서 파괴력이 크게 다르다. 불리한 조건을 가질수록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기가 어렵고, 미래는 더욱 예측 불가능해지고, 삶은 능력이 아니라 우연의 힘에 내맡겨진다.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힘 있는 ‘인맥과 학맥’은 그림의 떡이고 그만큼 감당해야 하는 삶의 불확실성과 불안은 커진다.
현대 사회에서 겪는 불확실성은 대부분 본래적인 것이 아니다. 조직화된 무책임의 구조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와 관계, 책임자가 누리는 힘과 위치에 비례하는 책임 의식이 없는 곳에서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은 큰 위력을 보인다. 하지만 권한과 책임의 상호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다모클레스의 칼’이 보여준다. 다모클레스는 기원전 4세기 전반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지배자 디오니시오스 2세의 측근이었다. 이 참주는 늘 자신의 절대 권력을 부러워하던 다모클레스를 연회에 초대해서 왕좌에 앉게 했다. 참주의 자리에 앉아서 연회를 즐기던 다모클레스는 우연히 위를 올려다 보고 기겁했다. 머리 위에 말총 한 올에 매달린 칼이 대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배자의 자리는 ‘언제라도 떨어질 수 있는 칼 밑에 있다’는 뜻이다. 더 이상의 긴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권좌의 크기와 상관없이 자신이 누리는 권좌로 얻는 힘과 이득은 다모클레스의 칼 아래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설령 말단의 작은 권좌여도 같다.
통제와 지배를 위해서 양산하는 불확실성, 즉흥적 발상으로 힘을 확인하려는 이런 불확실성은 안개와 같아서 오래가지 않아서 힘을 잃기 마련이다. 불확실성의 길을 거부하며, 함께 책임을 나누는 길 위에서는 특히 그렇다.
불확실성의 심각성은 경제 영역에 한정되지 않으며 그렇게 해결될 수도 없다. 불확실성이 모두에게 똑같이 ‘공정하고 민주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계층과 성별과 학력, 세대에 따라서 파괴력이 크게 다르다. 불리한 조건을 가질수록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기가 어렵고, 미래는 더욱 예측 불가능해지고, 삶은 능력이 아니라 우연의 힘에 내맡겨진다.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힘 있는 ‘인맥과 학맥’은 그림의 떡이고 그만큼 감당해야 하는 삶의 불확실성과 불안은 커진다.
현대 사회에서 겪는 불확실성은 대부분 본래적인 것이 아니다. 조직화된 무책임의 구조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와 관계, 책임자가 누리는 힘과 위치에 비례하는 책임 의식이 없는 곳에서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은 큰 위력을 보인다. 하지만 권한과 책임의 상호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다모클레스의 칼’이 보여준다. 다모클레스는 기원전 4세기 전반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지배자 디오니시오스 2세의 측근이었다. 이 참주는 늘 자신의 절대 권력을 부러워하던 다모클레스를 연회에 초대해서 왕좌에 앉게 했다. 참주의 자리에 앉아서 연회를 즐기던 다모클레스는 우연히 위를 올려다 보고 기겁했다. 머리 위에 말총 한 올에 매달린 칼이 대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배자의 자리는 ‘언제라도 떨어질 수 있는 칼 밑에 있다’는 뜻이다. 더 이상의 긴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권좌의 크기와 상관없이 자신이 누리는 권좌로 얻는 힘과 이득은 다모클레스의 칼 아래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설령 말단의 작은 권좌여도 같다.
통제와 지배를 위해서 양산하는 불확실성, 즉흥적 발상으로 힘을 확인하려는 이런 불확실성은 안개와 같아서 오래가지 않아서 힘을 잃기 마련이다. 불확실성의 길을 거부하며, 함께 책임을 나누는 길 위에서는 특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