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내다 버려야 하는 고물이 아니다 -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3년 05월 01일(월) 00:00 가가
지난 일은 언제, 어떻게 ‘지난 일’이 되는가? 그 지난 일이라고 불리는 경험이 왜곡·축소, 또는 누군가를 위해서 도구화되지 않고 현재 속에서 합당한 의미를 확보할 때다. 오래전의 경험과 사건이라고 해서 그 의미가 저절로 지워지지 않는다. 지난 일은 늘 현재, 지금의 삶을 구성하고 조건 짓는 특별한 시간 개념이며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은 곧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일은 맥락적 의미와 감정이 현재 속에 지속되는 한, ‘과거’가 되기를 거부한다. 여기에 지난 일이라고 해서 함부로 기계적, 물리적 기준으로 폐기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누구나 ‘살아낸 삶’, 경험에서 현재를 사는 방식을 찾는다. 그래서 ‘인간은 어머니가 출산하는 날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태어남을 강요하는 것은 삶이다’라고 한 콜롬비아의 작가 마르케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우리 자신의 인식, 생각, 판단력, 관점 모두가 우리 스스로 살아 온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의 총체라는 의미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게 되는가?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는가?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표현을 들여다보자. 사이드는 개인의 정체성이 외부와의 어떤 관계성, 어떤 형식과 힘, 욕망에 의해서 형성되는가를 말한다.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가 오리엔탈리즘의 개념으로 서구 중심적 태도를 비판하며 파란을 일으킨 책이 유명한 ‘오리엔탈리즘’(1978)이다. 사이드 자신이 상당히 복합적이고 다문화적 정체성을 가졌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이집트 카이로에서 자라고 미국에서 촉망받는 비교문학자와 교수로 활동하면서 살던 중에 심한 반(反)이슬람 분위기와 인종차별적 일들을 겪었다. 여기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현대의 고전을 쓴 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자신 개인은 성공적이고 탁월한 학자와 교수지만, 그러나 여전히 동양인이며, 소수 인종에 속하는 정체성 역시 과거가 아니고 엄연한 현재의 모습이라는 것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나온 저서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학문적 의미의 동양학이 아니고, 동양에 대한 인식과 판단의 관점을 중심으로 말한다. 우선 우리가 사용하는 동양이라는 개념은 서구인의 관점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산물이지, 자연적이거나 불변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사이드는 동양의 왜곡된 이미지가 물리적인 지배에만 의하지 않고, 문화적 지배를 통해서 교묘하게 작용된 것이라고 말한다. 문화는 단순하게 말하면 사람이 살고 행동하며 소통하는 형식과 방식이다. 사이드가 말하는 것은 문화가 어떻게 개인의 상상력과 정서에 영향을 주는가이다. 지배적 문화는 예술, 유행가, 개인의 기호와 태도 등에 깊게 스며들어서 삶의 방식과 인식의 틀을 만든다. 그래서 문화를 통한 지배는 지배 권력의 힘과 논리를 정당화하고, 지배 욕망까지 미화한다. 여기에 오리엔탈리즘의 위험한 함정이 있다고 말한다. 밖과 안, 개인과 집단에 작용하는 문화적·사회적 정체성 형성의 토대가 오리엔탈리즘이기 때문이다.
이 오리엔탈리즘이 지금은 철 지난 과거가 되었을까? 결코 아니다. 오리엔탈리즘은 먼 과거가 아니고, 오늘도 여전히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으며 재생산되고 있다. 밖으로부터 만들어진 오리엔탈리즘을 우리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으로 변형해서 사용한다. 우리 스스로 지배자의 눈과 머리로, 강자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힘 있는 ‘그들을’ 위해서 수많은 ‘나’를 규율과 관리로써 계몽해야 한다는 의식이 ‘내재적 오리엔탈리즘’이다. 이 내재적 오리엔탈리즘은 강한 힘을 가진 ‘그들이’ 원하는 것이 곧 자신이 원하는 것이며, 또한 세상이 원하는 것이라고 믿는 태도다. 이 모습이 자신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는 무지함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함께 살아 낸 삶, 여전히 살아 있는 과거는 낡고 쓸모가 없어지는 고물단지가 아니다. 망각의 상자에 넣었다가 누군가 때가 되면 내다 버리는 유물도 아니다. 오월의 정신을 워즈워스의 시 한 구절에서 찾는다. “미래의 회복을 위해 / 과거의 영혼을 간직할지니”
이 오리엔탈리즘이 지금은 철 지난 과거가 되었을까? 결코 아니다. 오리엔탈리즘은 먼 과거가 아니고, 오늘도 여전히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으며 재생산되고 있다. 밖으로부터 만들어진 오리엔탈리즘을 우리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으로 변형해서 사용한다. 우리 스스로 지배자의 눈과 머리로, 강자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힘 있는 ‘그들을’ 위해서 수많은 ‘나’를 규율과 관리로써 계몽해야 한다는 의식이 ‘내재적 오리엔탈리즘’이다. 이 내재적 오리엔탈리즘은 강한 힘을 가진 ‘그들이’ 원하는 것이 곧 자신이 원하는 것이며, 또한 세상이 원하는 것이라고 믿는 태도다. 이 모습이 자신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는 무지함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함께 살아 낸 삶, 여전히 살아 있는 과거는 낡고 쓸모가 없어지는 고물단지가 아니다. 망각의 상자에 넣었다가 누군가 때가 되면 내다 버리는 유물도 아니다. 오월의 정신을 워즈워스의 시 한 구절에서 찾는다. “미래의 회복을 위해 / 과거의 영혼을 간직할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