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자기 사랑법, 사적이지만 공적인 이야기-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3년 01월 02일(월) 00:45 가가
12월부터 피어나는 수선화, 나르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연유된 꽃 이름이다. 나르시스의 신화가 돌이킬 수 없이 비극적인 것은 나르시스의 그 지독한 사랑의 대상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르시스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매일 호수에 얼굴을 비춰보다가 영영 호수 속으로 빠지고 만다. 이 신화는 적잖은 질문을 남긴다. 나르시스가 사랑하는 ‘나’에게 아무도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가? 오직 ‘나’만을 향한 사랑은 자신을 절대적이며 항구적인 존재로 보며, 타자의 배제와 거부를 말하는 것인가? 또한 우리도 물결에 굴절하는 자신의 허상을 사랑한 나르시스의 자기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닐까?
나르시스의 모습은 현실에서도 드문 일이 아니다. 관계 대신 단절이, 상호성 대신 일방적 방식이 시대적 현상이라고 믿을수록 나르시스의 자기 사랑법은 자연스럽게 유효해진다. 이미 우리는 타자 없는 거울 속 세상에서 오직 ‘나’만을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나르시스의 사랑은 끊임없는 자기 복제의 욕망이자 집착이다. 그러나 거울을 통한 자기 복제인 ‘나’를 향한 사랑으로는 어떤 생명의 탄생도, 관계도 불가능한 것이다. 자기 이해와 인식은 타자에 대한 인식과 동시적이며, 상호적이어서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나의 밖에 타자에 대한 인식과 관계가 없이는 우리는 ‘나’를 만날 수도, 알 수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은 자기 복제가 아닌, 세상과 현실의 사태에 대한 미망 없는 응시 속에서 시작된다.
나르시스와는 다른 방법으로 ‘나’에게 이르는 길은 무엇일까?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호명된 82세의 아니 에르노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에르노는 프랑스의 노벨 수상자들 가운데서 유일한 여성 작가이자, 노벨 문학상 전체 수상자 119명 중에서 17번째 여성 작가이다. 에르노는 1940년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소읍의 작은 상점을 운영하는 가난하고 문맹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열세 살 때 고향을 떠나서 사립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신의 출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세련된 교양’의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이후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문학 교수 자격을 얻고 1977년부터 대학교수로 일했다. 에르노의 문학은 사회에서 금기로 여겨 온 주제들을 드러내는 ‘칼 같은 글쓰기’로 유명하다. 자신과 “오직 거리 두기를 통해 객관화하는” 방식으로 나르시스와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자신의 진실에 도달하고자 한다.
‘신분 상승’에 성공한 에르노는 자신을 미화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으며 경험과 삶이 어떻게 부모의 가난, 고통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진술한다. 중요한 것은 고통스럽게 억압된 ‘개인의 진실’이 곧 ‘사회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고통을 극복한 상황을 자신의 특별함으로 특권화하지도 않으며, 자기 중심의 시선으로 초점화하지도 않는다. 에르노가 자신을 만나는 방식은 부모의 삶은 물론이고 자신이 겪었던 계급적, 문화적 차이의 현실, 여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에까지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볼 수 있도록 부끄러움과 굴욕, 무력함 등을 묘사하여 계급적 경험에서 오는 고통을” 드러내는 용기와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의 경험과 삶에 대한 객관화 작업을 한다. 에르노의 부끄러움은 출신의 문제가 아닌, 자신이 운 좋게 ‘계급’을 이동했다는 성찰이다.
에르노는 작가의 책무를 “개인의 기억 속에서 집단의 기억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기 인식은 밑바닥 계층에 대한 억압이나 민중의 특별한 건강함과 위대함에 대한 맹목적 강변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적인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순수한 자아에 타인들, 법, 역사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확신에서 나온다.
이제, 우리에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무력감과 분노가 있다고 해도 나르시스적 자기 복제의 사랑법을 자신과 타인에게 강요하지는 말자. 에르노의 말처럼, 상실과 고통을 위한 진실의 회복이 그 방식부터 진실의 한 부분이 되기 위하여, 나와 연결된 ‘밖’의 진실을 잊지 말자.
‘신분 상승’에 성공한 에르노는 자신을 미화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으며 경험과 삶이 어떻게 부모의 가난, 고통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진술한다. 중요한 것은 고통스럽게 억압된 ‘개인의 진실’이 곧 ‘사회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고통을 극복한 상황을 자신의 특별함으로 특권화하지도 않으며, 자기 중심의 시선으로 초점화하지도 않는다. 에르노가 자신을 만나는 방식은 부모의 삶은 물론이고 자신이 겪었던 계급적, 문화적 차이의 현실, 여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에까지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볼 수 있도록 부끄러움과 굴욕, 무력함 등을 묘사하여 계급적 경험에서 오는 고통을” 드러내는 용기와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의 경험과 삶에 대한 객관화 작업을 한다. 에르노의 부끄러움은 출신의 문제가 아닌, 자신이 운 좋게 ‘계급’을 이동했다는 성찰이다.
에르노는 작가의 책무를 “개인의 기억 속에서 집단의 기억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기 인식은 밑바닥 계층에 대한 억압이나 민중의 특별한 건강함과 위대함에 대한 맹목적 강변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적인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순수한 자아에 타인들, 법, 역사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확신에서 나온다.
이제, 우리에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무력감과 분노가 있다고 해도 나르시스적 자기 복제의 사랑법을 자신과 타인에게 강요하지는 말자. 에르노의 말처럼, 상실과 고통을 위한 진실의 회복이 그 방식부터 진실의 한 부분이 되기 위하여, 나와 연결된 ‘밖’의 진실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