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통유’(通儒) 고봉 기대승-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2022년 11월 14일(월) 01:00 가가
조선시대, 숭문(崇文)의 사회 풍조와 국가의 권학 정책 때문에 참으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고려 말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성리학은 조선 건국부터 국가의 통치 이념이자 정통 학문의 위치를 확보하여 세월이 흐르며 깊고 넓은 학문 이론으로 발전을 계속하였다. 중종 시기에 정암 조광조의 학문 활동으로 올바른 방향이 잡히고,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계승으로 조선의 성리학은 절정에 이르는 수준에 오르게 되었다.
퇴계와 율곡은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였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퇴계의 후학들이 영남학파를 이루며 발전을 거듭하고, 율곡의 후학들이 기호학파를 이룩하여 발전을 거듭할 때, 호남학은 일재(一齋) 이항(李恒)과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학문 활동으로 후학들이 배출되면서 호남학파가 이룩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학파의 성립 시기에 영남학의 성립에도 기여하고 기호학이나 호남학의 성립에도 기여한 우뚝 솟은 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었다. 중종 22년에서 선조 5년까지의 45년 동안의 생애에 조선의 성리학을 본궤도에 오르도록 퇴계도 보좌하고 율곡도 지도했으며, 일재와 하서에게 젊은 시절 학문을 물어 자신의 학설을 수립한 고봉은 호남학 성립에도 중추적 구실을 했었다.
46세의 짧은 생애를 마친 고봉, 1572년에 떠난 때로부터 금년은 450년이 되는 해이다. 얼마 뒤면 고봉 학술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고봉 선생에 관한 자료를 찾아 읽어 보았다. 고봉은 행주 기씨로 광주 태생이자 광주에서 생을 마친 광주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광주에서 가까운 장성의 하서 선생을 찾아뵙고 태인의 일재 선생도 찾아뵈었다. 학문을 논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3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서울을 출입하면서 그때 서울에 계시던 퇴계 선생을 찾아뵙고 학문을 묻고 나랏일을 걱정하면서 퇴계의 제자가 되었다. 퇴계는 벼슬살이보다 학문에 마음을 기울이며 고향 예안에 계실 때가 많아, 고봉이 직접 퇴계를 뵙고 학문을 토론할 기회는 많지 않아, 두 분은 편지를 통해 학문과 사상을 논하였다. 이른바 ‘퇴고 왕복 서찰’이라는 철학 서적은 바로 두 분이 주고 받은 편지로 이룩된 책이었다. 무려 8년 동안 계속된 길고 긴 편지가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높이 끌어올린 철학서가 되었다.
고봉은 학문도 뛰어났지만 세상을 경륜하는 일에도 밝아 당시 국가의 적폐를 청산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도 혁혁한 공을 세운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고봉은 학자였다. 성리학의 사단칠정(四端七情) 이론에서 퇴계도 도움을 받았고 율곡도 도움을 받았다. 퇴계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떠나갈 때, 선조는 퇴계에게 물었다. “지금 세상에 학문하는 사람은 누가 있는가요? (今世孰爲學問人)” 퇴계가 즉석에서 오직 고봉만을 거론하면서 “기대승은 통유입니다.(稱以通儒)”라고 답했다. 정승과 대제학이었던 조선 문장가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고봉집 서문에서 말한 내용이다. 그러면서 장유는 퇴계 선생의 문하에 수많은 문인, 학자들이 있었지만, 퇴계는 기고봉을 으뜸 제자로 여겼다고 했다.(高峯奇先生爲之冠)
퇴계의 으뜸 제자이니 영남학파에 끼친 고봉의 영향을 알아볼 수 있고, 율곡은 고봉의 학문에 대하여 참으로 높은 평가를 내렸다. “퇴계와 고봉은 사칠(四七)의 학설이 무려 만여 언(萬餘言)인데 고봉의 논설은 분명하고 직절하여 마치 대나무를 쪼갠 듯하다(退溪與奇明彦 論四七之說 無慮萬餘言 明彦之論 則分明直截 勢如破竹: 栗谷集 卷十)”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러면서 퇴계학설은 자상하기는 하지만 의리가 밝지 못하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퇴계는 70세, 율곡은 49세, 고봉은 46세로 일생을 마쳤다. 고봉 같은 재주와 학문으로 퇴계처럼 70세까지만 사셨다면, 얼마나 많은 제자를 길러 냈고 얼마나 많은 저술을 남겼을까. 비록 그렇지만 고봉의 ‘논사록’(論思錄)이나 문집의 글은 조선을 대표하는 학술이자 문장임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조선을 대표하던 문장가들인 장유나 택당 이식이 모두 고봉의 문장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선생 가신 지 450년. 조선의 자랑스러운 학자이자 호남의 대표적 학자인 선생에 대한 연구나 현양 사업이 너무나 미미하다. 퇴계와 율곡이 학문을 극찬하고 계곡이나 택당이 문장가로 찬양한 고봉, 더 연구하고 더 현양하자.
고봉은 학문도 뛰어났지만 세상을 경륜하는 일에도 밝아 당시 국가의 적폐를 청산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도 혁혁한 공을 세운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고봉은 학자였다. 성리학의 사단칠정(四端七情) 이론에서 퇴계도 도움을 받았고 율곡도 도움을 받았다. 퇴계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떠나갈 때, 선조는 퇴계에게 물었다. “지금 세상에 학문하는 사람은 누가 있는가요? (今世孰爲學問人)” 퇴계가 즉석에서 오직 고봉만을 거론하면서 “기대승은 통유입니다.(稱以通儒)”라고 답했다. 정승과 대제학이었던 조선 문장가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고봉집 서문에서 말한 내용이다. 그러면서 장유는 퇴계 선생의 문하에 수많은 문인, 학자들이 있었지만, 퇴계는 기고봉을 으뜸 제자로 여겼다고 했다.(高峯奇先生爲之冠)
퇴계의 으뜸 제자이니 영남학파에 끼친 고봉의 영향을 알아볼 수 있고, 율곡은 고봉의 학문에 대하여 참으로 높은 평가를 내렸다. “퇴계와 고봉은 사칠(四七)의 학설이 무려 만여 언(萬餘言)인데 고봉의 논설은 분명하고 직절하여 마치 대나무를 쪼갠 듯하다(退溪與奇明彦 論四七之說 無慮萬餘言 明彦之論 則分明直截 勢如破竹: 栗谷集 卷十)”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러면서 퇴계학설은 자상하기는 하지만 의리가 밝지 못하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퇴계는 70세, 율곡은 49세, 고봉은 46세로 일생을 마쳤다. 고봉 같은 재주와 학문으로 퇴계처럼 70세까지만 사셨다면, 얼마나 많은 제자를 길러 냈고 얼마나 많은 저술을 남겼을까. 비록 그렇지만 고봉의 ‘논사록’(論思錄)이나 문집의 글은 조선을 대표하는 학술이자 문장임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조선을 대표하던 문장가들인 장유나 택당 이식이 모두 고봉의 문장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선생 가신 지 450년. 조선의 자랑스러운 학자이자 호남의 대표적 학자인 선생에 대한 연구나 현양 사업이 너무나 미미하다. 퇴계와 율곡이 학문을 극찬하고 계곡이나 택당이 문장가로 찬양한 고봉, 더 연구하고 더 현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