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락모락 고봉밥 한 그릇- 정유진 코리아컨설트 대표
2022년 10월 17일(월) 00:30
며칠 전 한 공예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와 작품 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제작한 선반장 위에 놓인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유기 그릇에 시선이 갔다. 그가 어렸을 때 친구 집에 놀러가면 이 같은 밥 그릇에 담긴 밥을 대접받았다고 한다. 그걸 다 먹을 수 있었냐는 질문에 그는 웃으며 조금 덜어 달라고 손사래를 칠 겨를도 없었다고 했다. 밥상에 밥이 오르는 순간 친구의 아버지께서 “어이 그것만 주면 쓰것는가? 학생잉께 더 묵어야제!” 하시면 친구 어머니께선 곧장 숫밥을 얹어 더 높이 쌓아 올린 고봉밥을 주셨다고 한다.

한 끼가 중요한 시절, 그 중심에 놓인 밥은 정성이자 정의 표현이었다. ‘밥은 먹었냐?’ ‘밥은 먹고 다니냐?”는 늘 주고 받는 인사말이었으며 식구로 인정하는 환대의 자리에는 밥상이 빠지지 않았다. 반찬이 차려지고 마지막으로 상에 올라온 밥은 한 톨도 남김 없이 먹어야 하는 복을 상징하는 귀한 밥이었다. 그런데 그런 고봉밥이 사라졌다.

지금 MZ세대가 보면 용도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한 큰 밥그릇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도 등장한다. 그의 작품 ‘새참’에는 어른 머리 크기만한 그릇에 담긴 밥을 먹는 인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제 밥그릇의 크기에는 변화가 생겼고 할머니댁 또는 친구네에서 경험한 감투처럼 올라간 밥은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한 때 일인당 연간 소비량이 무려 약 136㎏에 이른 적도 있었다는 쌀 소비는 해마다 감소하여 지난 30여 년 만에 무려 그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한다. 가파른 물가 상승에도 불구하고 쌀값만 폭락하는 이 기현상은 한가지 요인만으로만 설명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여러 요인 중 쌀 소비량 감소 원인만큼은 식습관의 변화로 ‘2021년 양곡 소비량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집밥 수요가 줄어들고 다양한 음식 배달과 외식을 통한 식문화의 영향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유럽의 경우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 1950년대 와인 사업은 매우 힘든 상황에 처했었다. 20세기 후반 전쟁으로 남긴 폐허들이 복구되면서 경제상황이 호전되자 와인의 생산과 소비에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지만 그 성황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일상의 중심이자 필수품처럼 취급되어 오던 와인은 과거와 달리 물, 맥주, 콜라 등을 비롯한 다양한 음료들로 그 소비량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그런 위기를 기회 삼아 특권층의 전용물로 인식되던 유럽 와인은 와인 문화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며 더 좋은 와인을 공급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더 큰 세상에서 대중화가 되었고 현재 우리 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전역에까지 사랑받는 주류가 된 것이다. 과연 과거 위축되어가던 소비 환경에서 와인의 문화적 가치와 상품의 가치를 계속해서 발굴하고 발전시키지 않았다면 지금에까지도 와인이 이토록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일본을 여행해 본 사람들 중에는 일본의 쌀밥이 맛있었다는 경험을 갖고 있거나 좀 더 미식가라면 커피처럼 다양한 쌀을 보기 위해 쌀 상점을 방문해 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유럽에 일반적으로 찰진 쌀을 ‘스시 라이스’ 또는 ‘재패니즈 라이스’로 불리며 일본 쌀이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이 쌀의 문화적 가치를 놓지 않고 미식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서 해온 결과이다.

저마다 다른 자연 환경에서 자란 벼가 도정을 거쳐 밥상에 오르기까지는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담겨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쌀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닌 식재료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쌀 소비가 줄어드니 무조건 더 먹자는 식의 홍보 영상으로 쌀 소비를 촉진할 것이 아니라 신석기 시대부터 벼농사를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우리의 쌀을 우리 생활의 근간으로 이해하며 쌀의 가치를 문화적으로도 더욱 발굴하고 키워 나가야 한다는 인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이 같은 문화적 가치 접근은 쌀의 맛과 유통의 방식을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쌀의 가치를 제고하는 교육·홍보 사업을 개발하고 최신 소비 경향을 반영한 다양한 가공식품 개발과 유통을 확대하는데 새로운 원동력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올해의 쌀값과 밥 한 공기의 가치를 당장에 바꿔 줄 수는 없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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