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정치’-윤현석 정치부 부국장
2022년 07월 07일(목) 01:00
세계 최초로 제목에 좀비(zombi)가 들어간 영화는 1932년 빅터 휴고 할페린 감독의 ‘화이트 좀비’다. 부두교를 믿는 나라 아이티로 신혼여행을 간 아름다운 여성을 탐하려는 섬의 농장주가 주술사를 동원하는데, 여기서 좀비가 등장한다. 좀비는 주술사가 만든 약물을 마시고 이성과 지성을 상실, 주술사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존재다. 이후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돼 인기를 얻은 좀비는 약물이 아니라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사람의 인육을 먹기 위해 달려드는 공포스러운 역할을 맡게 된다.

좀비를 조연으로 하는 콘텐츠들이 증가하는 것을 반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마치 현실에서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지나치게 맹목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풍자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 갈등 뒤에 숨어 상대방을 그저 욕설 비방하는 것으로 사익을 추구하거나 이해관계가 첨예해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젠더·세대 갈등을 파고들어 권력 기반을 다지려는 것이 좀비의 행태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심각한 빈부 격차, 수도권으로의 집중과 지방 소멸, 저출산과 고령인구 급증, 고물가·고금리에 따른 서민 고통 가중 등 해결해야 할 현안이 쌓여 있는데도 언제부터인가 정치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여야 정치인 가운데 상당수가 계파 수장에게 줄을 서고, 오로지 그들을 추종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꼬리 잡기, 쓸데 없는 다툼, 얄팍한 처세 등으로 가십거리만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어느 언론사가 실시한 ‘정치인 능력 및 자질 평가’ 조사에서 응답자의 87.6%가 ‘부족하다’고 답했다. 반면 ‘훌륭하다’는 답변은 10%에도 못 미쳤다. 정치인들이 현안에 대한 진지하고 면밀한 연구와 검토, 대다수 국민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해결 방안 마련, 이를 실천하기 위한 추진력 등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다. 입문 과정 자체가 불투명하고, 정치인들의 능력 검증 또한 거의 없는 우리의 정치 현실이 계파에만 충실한 ‘좀비 정치’를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chadol@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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