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역사 - 윤영기 특집·체육부 부국장
2022년 05월 23일(월) 01:00 가가
광주 고대문화를 대표하는 신창동 선사 유적지는 우연히 발견됐다. 1960년 담양 주민 양회채 씨는 유적지 인근 국도를 지나다 도로 옆 절개면에서 노출된 옹관을 보게 됐다. 이를 촬영해 사진과 함께 국립박물관에 근무하고 있던 김원룡 박사에게 알렸다. 발굴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63년 개시됐다. 김 박사가 이끄는 발굴팀이 소아용 옹관 53점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무려 2000여 점이 넘는 유물을 발굴했다. 양 씨의 제보로 시작된 발굴로 신창동 유적지는 1992년 사적 제375호로 지정됐다. 그가 아니었다면 신창동 유적은 훼손된 채 묻혀 버렸을 것이다.
1971년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에 살던 구재천 씨는 집 주변 창고 옆 땅을 파다 청동기 열한 점을 발견했다. 그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유물을 보관하다 엿장수에게 인계했다.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알아본 엿장수는 전남도청 문화공보실 공무원에게 넘긴 후 종적을 감췄다. 이들 유물은 한꺼번에 국보 제143호로 지정됐다. 그 가운데 하나인 청동팔주령(靑銅八珠鈴)은 국립 광주박물관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도 쓰였다.
최근 평창군 한 농지에서 청동기 시대 매장 시설 두 기와 돌칼 한 점, 돌화살촉 아홉 점, 대롱옥 여섯 점 등이 발견됐다. 주민이 옥수수를 심기 위해 고랑을 만들던 중 출토됐다고 한다. 전문 발굴단도 운이 좋아야 만날 수 있는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진 것이다. 그가 발견한 유물들은 평창 지역은 물론 우리 고대사를 살찌울 것이다.
문화재 발굴사에서 지역 주민들과 향토사가들의 적잖은 기여가 있었음에도 학계에서는 이들의 공로를 기리는데 인색하다. 김원룡 박사가 1964년 발간한 ‘신창리(옛 신창동) 옹관 묘지’ 발굴 보고서에 유적의 최초 제보자인 양회 채씨의 이름을 명기해 놓은 대목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김 박사가 기록해두지 않았더라면 그의 이름은 잊혀졌을 것이다. 문화재 당국 등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유적·유물을 지키고 보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주민들의 관심과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화재 당국이 유적과 유물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고 발굴에 기여한 이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고민해야 할 때다.
/윤영기 특집·체육부 부국장 penfoot@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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