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호와 저주 사이-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구장
2022년 04월 22일(금) 05:00 가가
가톨릭교회는 40일 동안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쳐 회개하는 사순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지난주는 주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결정적인 순간을 통해서 참된 인간의 삶을 살려는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주간이었다.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실한 사랑임을 말씀하신 예수는 당신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셨다. 가톨릭에서 가장 중요한 전례 시기인 사순 시기, 성주간, 부활 시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닌, 주님의 사랑을 가득 받는 가난하고 소외되며 벼랑 끝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이들을 위해 사는 것임을 재확인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최후의 만찬, 그리고 붙잡히신 후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여정의 수난 복음을 듣게 된다. 이때 예수를 대하는 사람들의 극명한 반응은 우리 내면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장면이다. 예수의 일대기에서 발생했던 많은 일들은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갇혀 지내 자유를 잃어버린 이들을 풀어 주셨고, 육체의 굶주림뿐만 아니라, 영적인 약함도 채워 주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구원자라고 환호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예수의 등장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받던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 한다. 환호와 폭력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를 보고 “다윗의 후손이시여!”라고 환호하며, 자기의 겉옷을 바닥에 깔아 예수의 입성을 환대했다. 그러나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던 당시 지도자들은 예수를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붙잡았고, 그를 심문하고 고문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는 가운데, 군중의 반응은 예루살렘 입성 때와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저주와 악담을 늘어놓는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루살렘 입성 때 환호와 찬양이 왜 저주와 악담으로 바뀌게 되는지? 환호와 저주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만족했었다.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었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며, 참된 인간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이것은 각각의 만족을 채워 줬을 뿐이 아니었을까? 위대한 분, 훌륭한 분, 그리고 메시아로 생각했던 분이 백성의 지도자들로부터 붙잡히고 고문당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한 심문을 당할 때 사람들은 변해 버린다. 그래서 환호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저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예수는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했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해 주셨다. 그러나 붙잡혀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할 예수에게서 더 이상 얻어 낼 것은 없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다른 사람을 강하게 억누르거나 짓밟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이 기득권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내적 힘이 되어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기득권자들은 그동안 누리고 만족했던 것들이 예수를 통해 방해를 받자 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통해 만족하는가? 만족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불만족스러워 하는가? 불만족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환호와 저주 사이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에 기뻐하고 슬퍼하는가? 기쁨과 슬픔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바로 내 만족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온통 만족감으로만 채울 수는 없다. 만일에 만족하는 것이 삶의 목표라면, 우리는 극한 대립의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고, 이 싸움은 서로가 다른 만족감 때문에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만족감은 바로 탐욕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만족했었다.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었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며, 참된 인간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이것은 각각의 만족을 채워 줬을 뿐이 아니었을까? 위대한 분, 훌륭한 분, 그리고 메시아로 생각했던 분이 백성의 지도자들로부터 붙잡히고 고문당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한 심문을 당할 때 사람들은 변해 버린다. 그래서 환호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저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예수는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했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해 주셨다. 그러나 붙잡혀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할 예수에게서 더 이상 얻어 낼 것은 없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다른 사람을 강하게 억누르거나 짓밟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이 기득권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내적 힘이 되어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기득권자들은 그동안 누리고 만족했던 것들이 예수를 통해 방해를 받자 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통해 만족하는가? 만족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불만족스러워 하는가? 불만족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환호와 저주 사이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에 기뻐하고 슬퍼하는가? 기쁨과 슬픔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바로 내 만족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온통 만족감으로만 채울 수는 없다. 만일에 만족하는 것이 삶의 목표라면, 우리는 극한 대립의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고, 이 싸움은 서로가 다른 만족감 때문에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만족감은 바로 탐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