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한 점일 뿐이다-최현열 광주 온교회 담임목사
2022년 03월 24일(목) 23:10 가가
서예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내 탁자 위에는 항상 문방사우가 놓여져 있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께 호되게 가르침을 받아서인지 긴 시간을 치워 두었다가도 다시금 꺼내 놓기를 40년째 반복하고 있다. 맑은 물을 연적에 담아 벼루에 쏟아 놓고 먹을 가지런히 잡고 뱅글뱅글 원을 그리며 간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먹물의 농도는 점점 짙어지고 그윽한 향기가 코를 자극하기 시작할 즈음 화선지를 아주 정갈하게 융 위에 펴 놓고 문진으로 고정시키고는 붓을 들어 먹물을 머금게 한다. 촉을 세우듯 먹물을 머금은 붓을 쓱쓱 벼루에 쓰다듬어 그 끝을 모으고 드디어 화선지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보다 정신을 집중한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 한 획 또 한 획을 써 내려간다. 원하는 문장을 완성했을 때의 그 기쁨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게 되었다 싶다가도 붓글씨를 쓸 때 몇 가지 낭패를 경험한 때가 있는데 정성스럽게 글을 다 써 놓고 붓을 벼루에 비스듬히 놓았는데 그만 붓이 때구루루 굴러서 화선지 위를 스치며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먹물의 농도가 적당하지 않아 글씨가 번져 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자세를 잡고 붓을 들었는데 먹물을 너무 많이 머금은 나머지 뚝 하고 먹물 방울이 화선지 위에 떨어져 본 적도 있다. 이런 경우 대부분 ‘버렸다’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화선지 위에 먹물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때가 있는데 그 방울이 크지 않고 획을 그어서 감출 수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을 조금 확대 해석해 보면 아무리 큰 먹물 방울이 화선지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종이가 크고 큰 글자를 쓰게 되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 한 점을 너무 크게 보는 경향이 있다. 얼마 전에도 설교하면서 흰 종이에 검은 점을 찍어 놓고 교인들에게 무엇이 보이는가 하고 물었더니 점이 보인다고 이구동성으로 대답을 했었다. 넓디 넓은 흰 종이가 보이기보다는 귀퉁이에 보이는 검은 점에 우리 시야를 모두 빼앗겨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급한 나머지 먹물을 쏟아 붓는다고 글씨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다 기회가 있고 때가 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종이가 크면 그 위에 떨어진 먹물은 그저 작은 점에 불과할 뿐이다. 마음을 넓고 크게 가졌으면 좋겠다.
과일을 먹을 때 좋은 것부터 골라 먹느냐 나쁜 것부터 골라 먹느냐를 가지고 다투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좋은 것을 나중에 먹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좋은 것부터 골라 먹는 사람도 있다. 쉽게 생각하면 후자의 경우가 처음에 좋은 과일을 먹으니 더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전자의 경우 처음엔 좋지 못한 것을 먹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다음에는 더 좋은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다. 후자의 경우 가장 좋은 것을 먼저 골라 먹는 기쁨은 있지만 사실은 계속 더 나쁜 것을 먹게 된다는 단점도 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문제를 문제로 보는 그 문제의 눈이 문제이지 문제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말장난 같이 보이지만 작은 문제를 너무 과하게 여기며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는 세례 요한이라는 인물이 등장 하는데 그는 예수님보다 앞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세례를 베풀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실로 당대의 스승이요 선지자로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뒤에 나타난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몰려가고 점점 인기가 올라갔다. 세례 요한의 제자는 이런 일들이 싫었고 시기심에 스승에게 물음을 던진다. 그런데 이미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는 굽혀 그(예수)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마가복음 1:7)라고 말하며 자기를 낮추었다. 예수님 또한 세례 요한을 가리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태복음 11:11)라고 평가했다.
우리에게는 관계 속에서 오는 어려움이 가장 큰 것 같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과를 친히 당신의 보혈로 덮어 주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은혜와 사랑은 언제나 허물보다 큰 것이 아닐까 싶다.
과일을 먹을 때 좋은 것부터 골라 먹느냐 나쁜 것부터 골라 먹느냐를 가지고 다투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좋은 것을 나중에 먹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좋은 것부터 골라 먹는 사람도 있다. 쉽게 생각하면 후자의 경우가 처음에 좋은 과일을 먹으니 더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전자의 경우 처음엔 좋지 못한 것을 먹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다음에는 더 좋은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다. 후자의 경우 가장 좋은 것을 먼저 골라 먹는 기쁨은 있지만 사실은 계속 더 나쁜 것을 먹게 된다는 단점도 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문제를 문제로 보는 그 문제의 눈이 문제이지 문제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말장난 같이 보이지만 작은 문제를 너무 과하게 여기며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는 세례 요한이라는 인물이 등장 하는데 그는 예수님보다 앞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세례를 베풀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실로 당대의 스승이요 선지자로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뒤에 나타난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몰려가고 점점 인기가 올라갔다. 세례 요한의 제자는 이런 일들이 싫었고 시기심에 스승에게 물음을 던진다. 그런데 이미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는 굽혀 그(예수)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마가복음 1:7)라고 말하며 자기를 낮추었다. 예수님 또한 세례 요한을 가리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태복음 11:11)라고 평가했다.
우리에게는 관계 속에서 오는 어려움이 가장 큰 것 같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과를 친히 당신의 보혈로 덮어 주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은혜와 사랑은 언제나 허물보다 큰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