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통합’을 위해 - 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2년 03월 18일(금) 04:00
선거가 끝났다. 이겼다고 환호성을 지르는 이들이 있고, 졌다고 좌절하면서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결과가 좋다고 해서 이긴 것이고, 결과가 나쁘다고 해서 진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의 권한을 위임할 지도자를 뽑는 선거가 승패라는 이름으로 나누는 전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겼다고 해서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졌다고 해서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선거 후 온통 머리가 복잡했다. 왜냐하면 대통령 선거의 모든 후보자들이 통합을 외쳤지만 선거의 결과는 분명하게 둘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래도 분열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만약 우리나라를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어떻게 하나의 유기체가 딱 둘로 나뉘어져 버릴 수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우리 마음에 무엇이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 내 삶을 움직이고 살게 하는 내면 깊숙한 곳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내 마음에서 무엇을 간절하게 원하고 지향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벌어진 현상에만 치우치지 않았으면 한다.

학업 성적이 떨어지는 것이 남한테 지는 것 같아 죽기보다 싫다는 어느 수험생의 말이 떠오른다. 왜 그렇게도 싫은 것일까? 내가 더 높은 위치에 올라야만 싫은 것이 없어질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바라보아야만 좋은 것인가? 도대체 우리의 삶과 상황이 어떻게 되어야 좋다고 말할 수 있으며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까?

뼛속 깊이 새겨진 경쟁의식 속에서 우리의 삶은 통합보다는 분열에 가깝다. 그런데 ‘통합’이라고 말하면서 ‘통합’을 위해 어떠한 준비와 과정도 없이 대화한다. 대화하면서도 어떤 의견도 듣지 않으려고 한다. 결국 ‘통합’을 위하여 대화하는 이유가 서로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하는 것 같다.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되어야 할 작업이 있다. 통합을 위한 그 답을 2018년 1월 프란치스코 교황 세계 이민의 날 담화문에서 찾아보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담화문에서 전쟁과 박해, 자연재해와 빈곤을 피해 달아난 수많은 이민과 난민의 비참한 상황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자며 다음의 네 가지 단어를 제시한다. ‘환대’ ‘보호’ ‘증진’ ‘통합”이 그것이다. 교황님은 이를 더 나은 미래를 찾아 고국을 떠나야만 하는 모든 이를 대하는 나라와 국민의 응답으로 제시하신다.

‘환대’는 누구든지 이민자나 난민처럼 이방인이 될 수 있으며, 그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을 받아들이자는 제안이다. 받아들이는 것은 곧 경청과도 같다. 나와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에 대해 그 입장이 되어 들어 주고 받아 주자는 것이다. 그래서 ‘환대’는 ‘통합’하기 위한 첫 단추이다. ‘보호’는 이민과 난민에게도 주어져 있는 천부인권인 인간 권리와 존엄성 보호를 말한다. 기본적 생활과 생명 유지를 지원하며 불법적인 관행으로부터 시작되는 혐오스런 폭력을 멈추라는 것이다.

‘환대와 보호’가 이루어졌다면 이제 이민과 난민이 ‘증진’될 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기본적 권리를 지닌 존재로서 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인데, 이민과 난민 그리고 그 가정이 유지될 수 있도록 기본적 생활은 물론 교육과 취업에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환대, 보호, 증진’이 이루어졌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통합’을 이야기할 수 있다. ‘통합’은 동등한 입장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통합’은 이민과 난민의 존재로 생겨나는 문화 간 풍요로움의 기회를 부여한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졌다거나 이겼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벌어진 현상의 그 본질이 무엇인지 물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통합’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통합’을 위해서 ‘환대, 보호, 증진’했는지 묻고 싶다. 경청했는지, 있는 그대로 대했는지, 함께 성장하도록 동반했는지, 그리고 동등한 입장에서 풍요로움을 위해 노력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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