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슬픔
2022년 02월 21일(월) 01:00
“트럭을 타고 가다 보면 사람들이 죽어 누워 있는 게 보였어. 짧게 깎은 머리가 파르스름한 게 꼭 햇빛에 돋아난 감자 싹 같았지. 그렇게 감자처럼 사방에 흩어져 있었어…. 도망치다 넘어진 모습 그대로 갈아엎은 들판에 죽어 누워 있었어…. 꼭 감자처럼….”

2015년 노벨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74)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문학동네)에 나오는 내용 가운데 일부다. 작가가 오랜 기간 수백 명을 인터뷰해 논픽션 형식으로 묶어 낸 이야기이다. 일명 ‘목소리 소설’로 불리는 알렉시예비치의 다큐멘터리 산문은 전쟁에 말려든 여성들의 체험을 강렬하면서도 절절하게 풀어낸다. 2차 세계대전을 겪은 100만 명이 넘는 여성 중 그 누구도 기억되지 못하는 현실을 작가는 고발한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야 했던 여성들은 그 후 어떻게 됐으며 그들의 삶에서 전쟁은 어떤 의미였을까?

1948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알렉시예비치는 그동안 사회성 짙은 글을 써 왔다. 또 다른 작품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원전 폭발 사고를 다뤘다. 마을 주민, 어린 소녀, 엔지니어 등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국가적 재난과 위기, 사랑과 죽음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크라이나는 유라시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다. 땅이 넓고 비옥한 천혜의 환경을 갖췄지만, 동방으로 진출하는 유럽 열강과 흑해와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러시아가 부딪치는 요충지다. 그래 역설적으로 빈번한 외세의 침략을 받았으며 폴란드를 비롯해 독일·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30년대에는 스탈린의 집단농장 정책으로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1991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서 독립했지만 그동안 ‘친러시아’와 ‘친서방’의 권력이 교차하면서 동·서로 지역 분열이 심화됐다. 나토 가입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일촉즉발 위기는 지정학적·역사적 관점에서 우리의 구한말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도 나라의 운명은 아랑곳없다는 듯 오직 대선 승리만을 위해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여야의 모습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슬픔’을 읽는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박성천 문화부 부장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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