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 초대석-46년 연극의 길 배우 윤석화] “연극은 대답 되어질 수 없는 질문”
2021년 12월 07일(화) 05:00
1975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신의 아그네스’ ‘명성황후’ 등 무대
연출가·소극장 대표 등 전방위 활동…‘윤석화 아카이브’ 시리즈 ‘자화상1’ 선보여

연극배우 윤석화는 지난 10월 20일부터 11월 21일까지 소극장 산울림에서 ‘윤석화 아카이브’ 시리즈의 첫 번째 공연인 ‘자화상1’을 선보였다. 1975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한 뒤 50년 가깝게 무대를 지켜오며 명실공히 한국 연극을 대표하는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연극배우 윤석화(65)는 지난 1975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한 후 꼬박 46년간 척박한 한국 연극무대를 지켜오고 있다. 또한 연출가, 제작자, 소극장 ‘정미(美)소’(2002~2019) 대표, 공연예술 전문잡지 발행인, 프로듀서, 비영리 단체 한국 연극인 복지재단 이사장(2017~2020년) 등을 맡아 전방위로 활동해 오고 있다. 최근 ‘윤석화 아카이브‘ 프로젝트 첫 순서로 1980~90년대 공연됐던 ’딸에게 보내는 편지‘ 등 세 작품을 소극장 산울림 무대에 올린 그를 만났다.

◇‘자화상Ⅰ’ 소극장 산울림서 한 달간 공연=“나는 배우입니다. 50년 가까이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습니다. 무대 위의 불빛과 갈채가 화려할수록 그 뒤안길의 그림자는 길고 낯설고 외로운 길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자리한 소극장 산울림 무대. 막이 오르면 배우 윤석화가 등장해 수어(手語)로 프롤로그(prologue)를 연다. 지난 10월 20일부터 11월 21일까지 한 달간 무대에 올려졌던 ‘윤석화 아카이브-자화상Ⅰ’의 첫 장면이다.

10개월 장기공연의 신화를 쓴 모노 드라마 ‘딸에게 보내는 편지’.
배우는 80여분 동안 쉼 없이 ‘하나를 위한 이중주’(1988년)의 환자 스테파니, ‘목소리’(1989년)의 남자로부터 버림받은 여자, ‘딸에게 보내는 편지’(1992년)의 37살 엄마 가수 멜라니로 변신, 혼신의 힘을 다해 열연했다. 이번 세 작품은 30대의 윤석화를 빛냈던 작품들로 구성과 연출, 연기 등 1인 3역을 해냈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 해도 AI(인공지능)로 대체불가한, 인간만이 창조할 수 있는 ‘아날로그’ 연극의 힘을 볼 수 있었다.

커튼콜 때 배우 윤석화는 무대 인사를 하며 무엇보다 소극장을 찾아준 관객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50년 가깝게 연극 무대를 지켜온 배우의 열정에 갈채로 화답했다.

“고백하자면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하면서 약간 흔들렸습니다. 한 관객이 울어서 저도 갑자기 (30여 년 전) 옛 추억이, 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와서 흔들렸지만 오늘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소극장 산울림 무대에 올렸던 ‘하나를 위한 이중주’ 1988년 공연.
◇“산울림은 연극인생의 고향 같은 곳”=배우 윤석화는 총 3부로 기획된 ‘윤석화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첫 순서로 ‘자화상Ⅰ’을 소극장 산울림 무대에 올리면서 팸플릿에 “이 작품은 30년 넘게 소극장 산울림을 지켜내신 연출가 임영웅 선생님과 불문학자 오증자 선생님, 그리고 산울림을 사랑했던 관객 분들에게 드리는 오마주(Hommage)”라고 적었다. (올해로 창단 52주년을 맞은 ‘극단 산울림’은 1969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초연을 시작으로 한국 연극사(史)의 한 페이지를 써온 현대연극의 산실이다. 1985년 홍익대 인근에 전용극장인 ‘소극장 산울림’을 지었다.) 최근 공연을 마친 후 산울림 1층 카페에서 배우 윤석화의 ‘자화상Ⅰ’ 공연에 대해 물었다.

▲30대 시절에 맡았던 역할을 60대에 다시 했는데 어떤 차이가 있나요?

=작품에 대한 이해도와 해석은 더 깊어졌고요. 표현도 사실은 더 깊어짐과 동시에 더 단순화시킨다고 할까요, 뭔가 ‘이제야 제대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지만 역시 겉으로 보이는 세월의 다름을 또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의 변신은 무죄이고, 무죄이기 때문에 내가 그 정신만 지켜낼 수 있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고 30년 세월을 거슬러 가본 거고요.

▲오프닝 때 “나는 배우입니다”라고 하는 독백에 50년 가까운 연극인생이 압축돼 있습니다. 이번 ‘자화상Ⅰ’ 공연을 소극장 산울림에서 하시게 된 까닭은.

=저한테는 산울림이 고향 같죠. 연극이라는 것이 너무 척박한 땅인데다 대형 뮤지컬들이 많이 생기면서 왜소해지기도 했고요. (임영웅) 선생님께서 예전만큼 활동을 못하시다 보니까 산울림의 빛났던 업적들이 무너질 위기라는 생각도 들었고, 올해 초에 선생님께 신년인사 드리러 갔다가 산울림을 어떻게 해서든지 복구를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연극이란 건, 특별히 예술이란 건 지켜내야 할 것은 지켜내야 하고,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975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배우 윤석화는 지난 2004년에 펴낸 ‘작은 평화-윤석화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연극에 뛰어들었던 이유를 ‘스무 살에 우연이었지만 마치 필연처럼 연극을 시작해’ 라고 밝힌다.

윤석화의 스무 살 시절로 시계를 되돌려 보자. 당시 CM송 가수로 활동하던 그는 광고회사 사무실 옆에 있던 민중극단 사무실에 놀러갔다가 연극과 ‘운명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미국에서 막 귀국한 연출가 정진수의 권유로 1975년 연극 ‘꿀맛’(영국 여류작가 셸라 딜래니 作)으로 데뷔했다. 1980년 연극 공부를 위해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가 ‘신(神)의 아그네스’(미국 존 필미어 作)를 접하고 벅찬 감동을 받았다.

이후 1983년 8월, 극단 실험극장 소극장 무대에 올려진 ‘신의 아그네스’는 첫날부터 전좌석이 매진될 정도로 파란을 일으켰다. 당초 한 달 예정이었던 공연은 유례없는 전회 매진 속에 해를 넘겨 총 532회 공연에 10만 관객 동원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아그네스’ 역으로 출연한 윤석화는 이름 석 자를 대중들에게 각인 시켰다.

“솔직히 ‘신의 아그네스’(1983~1984년) 이후로, ‘흥행의 동방불패’라고도, 하여튼 제게 인기라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었어요. 이만큼 살아내 보니까 그때보다 연기는 더 잘하는데(웃음) 물론 (지금은) 예전만큼 인기가 없죠. 그 인기가 있던 시절에는 무엇이든지 다 되었던 시절이에요. 그런데 그 시절을 제가 교만하지 않고 정말 일 년이면 열한 달을 공연을 하고 산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해서 늘 극장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저에겐 늘 관객이 저의 친구였고, 관객들과 울고 웃고 그렇게 살아왔어요.”

40대인 1990년대에는 연극 ‘덕혜옹주’와 뮤지컬 ‘명성황후’, 연극 ‘나, 김수임’ 등 역사인물을 다룬 작품에서 주연을 맡아 열연했다. 특히 1998년 오페라가수 마리아 칼라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 ‘마스터 클래스’로 그 해 최연소 ‘이해랑 연극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특히 2011년에는 영국 웨스트엔드에 진출, 연극 ‘여행의 끝’(Journey’s End)을 공동 제작해 웨스트엔드 최초의 한국인 공연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듬해에는 뮤지컬 ‘톱 해트’(Top hat)에 프로듀서로 참여해 ‘로런스 올리비에상’을 수상하는 등 입지를 굳혔다.

최근 임영웅(오른쪽) 연출가와 함께 한 연극배우 윤석화
최근 몇 년간 윤석화는 영국 극작가 아놀드 웨스커(1932~2016) 원작의 모노드라마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나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공연 시기가 2020년 10월에서 올 4월로 연기됐다가 아쉽게도 결국 무산됐다.

윤석화는 앞으로 ‘예술의 전당’ 공연작품과 지금은 사라진 소극장 무대에 올려졌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윤석화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이어갈 계획이다. 아직 공연시기와 장소는 정해지지 않았다.

50년 가깝게 연극 무대를 지켜온 윤석화에게 연극은 무엇일까?

“연극을 할 때마다 왜 이 작품을 하는지 이유들이 다 다르잖아요. 제가 나름대로 작품을 분석하고 ‘아! 이런 얘기라면 관객들에게 이런 것들을 전해줄 수 있겠다’라는 나름대로의 의미와 질문인거죠. 저는 관객들에게 A라는 질문을 던져줬는데 관객은 A에 대한 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B와 C도 생각해요. 그렇듯이 (연극에서 던져주는) 좋은 질문은 그 너머까지도 볼 수 있고, 그 뒤안길도 볼 수 있습니다. 연극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대답되어 질 수 없는 대답’을 던지는 걸꺼에요. 다만 그 질문을 던지는 모양이 다른 것일 뿐이죠.”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사진=윤석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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