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 34돌, 김경숙 열사를 추모함-박 석 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우석대 석좌교수
2021년 06월 21일(월) 03:50 가가
역사가 제대로 바로잡히려는 징조인가? 지난 6월 10일, 6·10항쟁 34돌 기념일을 맞아 민주주의 발전 유공자 29명에게 모란장인 훈장과 국민 포장 및 대통령 표창장이 수여되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목숨을 바쳐 민주주의를 지켰던 열사들에게 포상이 수여되었으니 반갑고 기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목숨을 바친 희생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 이만큼의 민주화라도 이룩될 수 있었을까.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참 잘한 일이다 싶으면서도 너무 늦지 않았느냐는 아쉬움도 남는다.
계훈제 선생, 김근태 의장, 김병곤 부의장 등 모두 25명이 이번에 모란장을 수여 받았다. 그중에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우리 지역 사람들이 많았다. 박관현·나병식·명노근·박래전·조성만·정광훈·표정두·김경숙 열사 등 여덟 분. 이름만 보아도 열사이자 투사이던 그분들을 우리는 쉽게 기억할 수 있다. 게다가 나로서는 대부분 생전에 가깝게 지냈던 분들이어서 더욱 그분들의 의혼과 열혈의 민주주의 정신에 추모의 마음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명노근 교수, 나병식·박관현 후배, 정광훈 친구, 표정두 제자, 모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던 분들이다. 신문에 실린 그분들의 사진을 보면서 그 무섭고 힘들던 투쟁의 시대에 있었던 옛 일을 되살려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분, 생전에 전혀 인연이 없던 분이 바로 김경숙 열사다. 김 열사는 순국한 뒤에야 특별한 인연을 맺었으니, 오늘은 그 분 김 열사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1977년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가 단체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미 서울에는 앰네스티 서울지부가 있었으나 우리 광주에는 그런 단체가 없었다. 그래서 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광주의 뜻있는 민주 인사들이 모여 앰네스티 광주지부를 결성하여 활동을 시작한 때가 그해 12월이었다. 그후의 광주지부 활동 내용은 2007년에 간행된 ‘광주 앰네스티운동 30년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생략한다.
1979년, 혹독한 유신독재의 마지막 해였다. 독재 타도를 외치는 민중의 함성이 온 나라를 뒤엎고 있던 시절,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날아들었다.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며 노동 투쟁의 맨 선두에 서 있던 광주의 딸 김경숙(金景淑 1958~1979) 열사가 순국했다는 소식이었다. 때는 79년 8월 11일 새벽 2시 30분 경, 장소는 서울 마포 신민당사 YH여공 노동투쟁 현장. 그는 거기서 그렇게 민주주의에 몸을 바쳤다.
이 소식을 접한 광주앰네스티 회원들은 충천하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광주의 딸 김경숙 열사의 추모 행사를 갖기로 하고 즉각 추모회를 열었다. 마침 그해 8월 13일 광주 YMCA 무진관에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초청해 시국강연회를 열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김 총재는 당사에서 벌어진 투쟁사건으로 참석이 불가능해졌지만, 광주앰네스티는 바로 그날 그 장소에서 추모회를 열기로 발표하였다. 8월 13일 저녁의 일이다.
그때 광주지부 총무로 일하던 필자는 11일의 뉴스를 듣고 오후에 광주시 학동에 있는 김 열사의 집을 찾아가 유품을 확인하고 남동생에게 보낸 편지 등을 읽어 본 뒤 그가 노동운동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추락사가 아닌 타살로 믿고, 바로 추도식 준비를 했다. 광주 YMCA 대강당에는 무려 1500여 명의 시민들이 운집하였다.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청중들의 열기를 안고 추모 행사가 진행됐다. 필자가 긴급히 추모사를 작성하고 그때 광주의 민주 투사이자 종교 지도자이던 유연창 목사께서 추도사를 낭독했다. ‘겨레 앞에 순국한 위대한 민족의 딸 고 김경숙 양 영전에!’라는 제목의 추도사는 통곡에 가까운 비통한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북악산도 한강 물도 슬피 울고/ 무등산 극락강도 애처로이 울어 예는/ 이 나라 광복의 달 8월의 하늘 아래/ 겨레의 딸 김경숙 양이 꽃다운 스물한 살 처녀의 몸으로/ 조국의 민주 회복 투쟁에 희생의 제물로/ 이 나라 근로 민중 앞에서 십자가 지고 그리스도 제자의 길을 갔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추도사에는 김경숙 양의 가난했던 가정 형편, 누나가 돈을 벌어 남동생을 가르치던 뜨거운 형제애, 부모님을 편안히 모시려던 효심, 민주주의를 회복해야만 국민들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김경숙의 생각까지를 모두 담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노동3권을 쟁취해 내겠다는 각오도 충분히 기술되어있다.
노동 열사 김경숙 양이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으니 그의 외로운 영혼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좋겠다. 광주의 딸, 김 열사의 의혼들이 뭉쳐서 광주의 5·18 항쟁도 일어났다. 우리 모두 김 열사를 추모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빌어 드리자.
1979년, 혹독한 유신독재의 마지막 해였다. 독재 타도를 외치는 민중의 함성이 온 나라를 뒤엎고 있던 시절,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날아들었다.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며 노동 투쟁의 맨 선두에 서 있던 광주의 딸 김경숙(金景淑 1958~1979) 열사가 순국했다는 소식이었다. 때는 79년 8월 11일 새벽 2시 30분 경, 장소는 서울 마포 신민당사 YH여공 노동투쟁 현장. 그는 거기서 그렇게 민주주의에 몸을 바쳤다.
이 소식을 접한 광주앰네스티 회원들은 충천하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광주의 딸 김경숙 열사의 추모 행사를 갖기로 하고 즉각 추모회를 열었다. 마침 그해 8월 13일 광주 YMCA 무진관에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초청해 시국강연회를 열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김 총재는 당사에서 벌어진 투쟁사건으로 참석이 불가능해졌지만, 광주앰네스티는 바로 그날 그 장소에서 추모회를 열기로 발표하였다. 8월 13일 저녁의 일이다.
그때 광주지부 총무로 일하던 필자는 11일의 뉴스를 듣고 오후에 광주시 학동에 있는 김 열사의 집을 찾아가 유품을 확인하고 남동생에게 보낸 편지 등을 읽어 본 뒤 그가 노동운동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추락사가 아닌 타살로 믿고, 바로 추도식 준비를 했다. 광주 YMCA 대강당에는 무려 1500여 명의 시민들이 운집하였다.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청중들의 열기를 안고 추모 행사가 진행됐다. 필자가 긴급히 추모사를 작성하고 그때 광주의 민주 투사이자 종교 지도자이던 유연창 목사께서 추도사를 낭독했다. ‘겨레 앞에 순국한 위대한 민족의 딸 고 김경숙 양 영전에!’라는 제목의 추도사는 통곡에 가까운 비통한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북악산도 한강 물도 슬피 울고/ 무등산 극락강도 애처로이 울어 예는/ 이 나라 광복의 달 8월의 하늘 아래/ 겨레의 딸 김경숙 양이 꽃다운 스물한 살 처녀의 몸으로/ 조국의 민주 회복 투쟁에 희생의 제물로/ 이 나라 근로 민중 앞에서 십자가 지고 그리스도 제자의 길을 갔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추도사에는 김경숙 양의 가난했던 가정 형편, 누나가 돈을 벌어 남동생을 가르치던 뜨거운 형제애, 부모님을 편안히 모시려던 효심, 민주주의를 회복해야만 국민들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김경숙의 생각까지를 모두 담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노동3권을 쟁취해 내겠다는 각오도 충분히 기술되어있다.
노동 열사 김경숙 양이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으니 그의 외로운 영혼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좋겠다. 광주의 딸, 김 열사의 의혼들이 뭉쳐서 광주의 5·18 항쟁도 일어났다. 우리 모두 김 열사를 추모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빌어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