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우석대 석좌교수] 전영진 열사를 추모하며
2021년 05월 24일(월) 03:10
5·18 민주항쟁 41주년 기념식이 지난주에 있었다. 그 참혹했던 살상의 참극이 벌어졌던 때가 엊그제만 같은데 벌써 40년을 훌쩍 넘었으니,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만 있었다. 30대 후반의 팔팔하던 고등학교 교사이던 나는 우리 나이로 80에 이르고, 백발이 허연 노인의 처량한 모습으로 남았다. 포악한 계엄군의 조준사격으로 고3의 소년 전영진 열사가 숨진 지도 40년이 넘었다. 아침부터 주룩주룩 비가 내리던 지난 5월 15일, 그날은 하필이면 스승의 날이기도 했다. 이른 아침 서울에서 기차로 광주에 도착하여 열사의 아버님 전계량 선생을 뵙고 우리는 모처럼 뜨겁게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고 점심을 함께하면서 막걸리를 몇 잔 마셨다.

우리는 손목을 붙잡고 차에 올라 5·18 국립묘지에 있는 전 열사의 묘소 앞에 꽃바구니를 바치고 고개를 숙여 묵념을 올렸다. 우리들의 곁에는 그날 전 열사가 함께 투쟁했던 친구 두 명과 후배 한 사람이 나란히 섰다. 이렇게 간단한 묵념의 추모 의식을 위해 왜 그렇게 긴 세월을 기다려야 했던가. 살아남은 제자들이야 잘 가르쳤든 못 가르쳤든, 특별히 책임의식을 느껴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 생명을 잃어버린 뒤라면, 어떻게 가르쳤기에 죽어 가고 말았던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1979년 혹독한 독재의 유신 말기. 숨 막히던 시절에 광주 대동고 영어 교사로 2학년이던 전 열사의 학급을 포함해 네 개 학급의 학생들과 수업을 했다. 그때 내가 들어가던 네 개 학급의 학생들만 운동장에 모여 보충수업 폐지와 교련 반대 데모를 감행했다. 그날이 10월 26일. 그때 데모 주동 학생들은 모두 연행되어 밤샘 수사를 받았고 모든 것을 내가 시켜서 일어난 사건으로 수사를 마치고 아침이면 나를 연행해 조사하려던 참이었다. 한데 새벽부터 방송에는 장송곡이 울리면서 대통령의 유고! 유고!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되어 학생들도 풀려나고 나도 연행을 면한 채 사건이 끝날 수 있었다.

그 다음 해가 1980년. 5·18이 광주에서 일어났다. 대동고 독서회에서 활동하던 고3의 전영진 열사는 21일 도청 앞에서 투쟁하던 중 조준사격으로 생명을 잃고 말았다. 27일 무자비한 학살로 도청에 시체만 쌓이면서 광주항쟁은 피투성이 속에 마감되었다. 항쟁의 주모자로 나를 수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죽음을 면하려 몸을 숨기고 시국을 관망했다.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더 이상 광주에서의 은신이 어렵자 6월5일에 나는 서울로 도망치고 말았다.

광주에 없던 내가 전 열사를 추모할 방법은 없었다. 7개월을 은신하다 끝내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서 징역을 살다 출소할 때가 82년 3월. 공포에 휩싸여 있던 우리는 전 열사의 묘소를 찾아갈 엄두도 못 냈다. 그 후로야 살아 있던 제자들이랑 만나면서 항쟁의 비극을 이야기했지만, 죽어 버린 전 열사에게는 해야 할 말을 잃고 있었다. “행여라도 내가 수업시간에 말했던 내용이 자극이 되어 그런 용감한 투쟁을 하다 목숨까지 잃었지 않았을까”라는 마음의 부담 때문이었다.

그 후 5·18기념재단 이사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수없이 국립묘지를 방문했어도 전 열사의 묘소 앞에는 설 용기를 내지 못했다. 말이 없는 죽은 자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를 짐작할 수가 없어서였다. 마침내 지난해 가을 열사의 아버님을 우연히 만나, 흔연스럽게 많은 민주투사를 양성한 훌륭한 교사라고 포옹해 주는 관용에 힘입어 바로 전열사 빈소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 미루다가 41주년에 다가오는 스승의 날을 맞아 찾아올 수 없는 제자에게 찾아갈 수 있는 스승이 추모하러 가겠다는 마음으로 끝내 묘소 앞에 설 수 있었다. “삼가 열사의 영혼을 위로하며 간절한 추모의 정을 표하노라!” 이렇게 추모의 뜻을 전하면서, 수많은 학생들을 의식화시켜 반정부 투쟁의 대열에 서게 했다면서 불온 교사로 낙인찍혔던 나의 허물도 벗어나고 싶었다.

전 열사는 목숨을 바쳐 숭고한 의혼으로 민주주의를 지켜 주고 있다. 그의 동기동창은 집권여당의 대표도 되고 후배에서는 검찰총장도 나오는 등 큰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불온 교사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열사의 묘소 앞에서 추모의 정을 표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열사의 영원한 안식을 빌고 또 빌 뿐이다. 국가폭력으로 양민을 학살하는 ‘야만’이 영원히 사라지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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