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우석대 석좌교수] 4·19에서 월남 파병 반대 데모까지
2021년 04월 26일(월) 08:00
4·19혁명 61주년이 지났다. 고등학교 시절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킨 위대한 혁명정신은 대학생 때까지 이어졌다. 그 정신은 민의를 배반한 독재 정권의 퇴진을 외치는 힘으로 작동했다.

1964년 전남대에서는 ‘5·27 대통령 하야 요구 데모’가 일어나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5·27은 며칠 뒤의 6·3 한일회담 반대 운동에 불을 당겨 대대적인 시위가 온 나라를 진동시켰다. 신동호 경향신문 기자가 쓴 ‘오늘의 한국 정치와 6·3세대’라는 책에 그때 일이 자세히 적혀 있다. “전남대 1차 6·3운동은 이홍길 등 5명이 기소되고 박석무·유제린·조병갑·이진규 등 17명이 무기정학, 정동년·김귤근(당시 총학생회장) 등 13명이 ROTC에서 제단 처분 됨으로써 마무리됐다.” 이러한 내용이 말해주듯, 이 운동은 학생들의 희생이 큰 상태로 끝이 났다.

1965년 학생운동은 전남대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 이른바 3·31 데모인데, 특이하게 총학생회가 주동이 되어 공식 조직으로 운동을 했던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었다. 그때 총학생회장은 뒷날 5·18 항쟁의 수괴로 몰렸던 정동년이었다. 이런 과정에는 약간의 설명이 더 필요하다. “3·31로 정동년은 구속되고, 정동년·전홍준 등 도합 7명이 제적된다.”(같은 책, p178) “5·27 하야 데모 여파로 무기정학에서 구속되는 바람에 3·31의 2선에 머물러 있던 박석무의 활약이 시작된다.”(같은 책)

그때부터 나는 정동년의 석방 및 제적자 복적 운동을 벌였다. 군대 안 보내기 운동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단식·성토대회·서명운동 등 모든 방법을 동원했는데, 그 결과 5월 초 정동년을 제외한 제적생 모두가 무기정학으로 바뀌었다. 특히 정동년은 6월 초 70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대학가는 조기 방학에 들어가 8월 23일에야 개학하였다.

“박석무 역시 데모 주동자의 신변 관계를 마무리한 뒤 2학기가 개학되자마자 8·23 월남 파병 반대 데모를 주동 학교 생활을 장렬하게 마감하고 만다.” 이처럼 민족 모순 문제가 대학가에 정식으로 등장한 파병 반대 데모로 번지기 시작했다. 4·19혁명으로 미국 문제는 상당히 수면 위로 올라왔지만, 군사정권의 철저하고 강고한 반공 논리에 억눌려 미국의 후진국에 대한 본질을 이야기하는 일은 극히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월남 파병까지 우리나라에 강요하자, 우리는 그 문제만은 입을 닫을 수가 없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반미의 구호가 최초로 터져 나온 것이 바로 전남대에서의 8·23 월남 파병 반대 데모였다. “8·23데모는 박석무·전홍준·김동근 3인방의 작품이었다. 대회 공식 명칭은 ‘한일 국교비준 무효 성토대회’였다. 그러나 이 데모는 ‘우리들은 월남의 사지에서 양키들의 총알 방패가 될 수 없다’라는 플래카드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반공법 위반 사건으로 비화돼 버린다. ‘북괴 주장과 같은 구호를 걸었다’는 이유였다.”(같은 책 p178) 결국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둔갑했다.

“영장 신청, 기각, 재신청, 재기각이 반복된다. 결국 이들은 집시법 위반으로 정식 구속된다.”(같은 책) 그 당시는 그래도 조금은 양심이 살아 있던 법원이었던 것 같다. 학생들의 데모를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시킬 수는 없다는 이유로, 기각을 반복했다. 검찰보다는 법원이 나은 것이었다.(당시 동아일보에 이 사건이 자세히 보도되었다.)

오래지 않아 석방된 나는 65년 9월 초순 군 입대 영장이 나오자 정동년과 함께 논산행 군용열차에 몸을 싣고 훈련병으로 입소했다. 훈련을 마친 나와 정동년은 강원도 양구의 이웃 사단에 근무하며 주말이면 외출을 나와 함께 짜장면을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같은 날 입대해서 같은 날 함께 제대했으니, 정동년과 나와의 인연과 우정은 특별한 관계였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렇게 끈끈한 마음과 동지애가 있었다.

이제 8·23 파병 반대 데모 이야기를 끝내자. 민의를 짓밟고 강제로 한일 국교를 체결한 군사독재 정권은 국회 비준까지 강제로 해치웠다. 그리고는 젊은이들을 월남의 사지로 보내 미군의 총알 방패가 되도록 했으니 의기충천하던 젊은이들이 어떻게 그것을 뜬눈으로 보고만 있었겠는가. 억지 한일회담은 아직도 그 후유증이 남아 있고, 파병도 역사적 비판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파병 반대 데모야 학생운동사에서 민족 모순의 단면을 역사에 노출시켰고 그 후로도 학생운동의 맥락을 이어 주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전남대의 대통령 하야 데모와 파병 반대 데모는 학생 데모의 질적 고양을 이뤄 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큰 데모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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