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준 순천 빛보라교회 담임목사] 노래하는 삶
2021년 04월 23일(금) 07:00 가가
아주 어렸던 지난 시절들을 회상해 보면 모든 자연 만물은 대화의 대상이었다. 나무와 풀잎, 꽃들과도 인사나 대화를 나눴고 길거리를 지나가는 강아지와도 소통하며 안부를 묻곤 했던 기억이 아른거린다.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하늘을 나는 종달새의 노래를 따라 뜻도 의미도 없는 노래를 불렀던 기억들도 있다. 이렇듯 어렸을 때는 자연과 교감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는데 성장하면서 우리는 대화의 대상과 관심을 현실 세계로 이동킨다.
한편으로 어린 시절의 감정과 추억을 동심이라고 표현하고 그때의 일상들을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정의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비현실적 허구의 세계로 간주한다. 대자연을 향유하기에 적합한 인간의 오감, 즉 시각·청각·미각·후각·촉각은 오직 현실 세계의 범위에서 인지되는 것만이 타당한 상식이라는 고정관념이 깊이 자리를 잡는다. 즉 인간의 오감은 바로 그것 때문에 근본적인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능력을 오히려 제한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본질적인 것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와 시인들은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볼 것을 그렇게 애써 설득하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상은 현실과 허구가 실타래처럼 얽혀져 있는 삶의 현장이다. 마음의 눈을 상실한 인간의 삶은 밥 한 그릇과 옷 몇 벌을 사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시간을 파는 것이 정당한 노동의 법칙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을 바라보는 눈을 상실한 불균형한 삶은 치열하게 현실과 경주한다. 더러 성공의 화려한 메달을 얻은 것 같지만 남는 것은 인생의 상처와 허무함이 가득한 삶의 보따리이다. 자연의 언어와 마음의 눈을 상실한 인간은 낡고 병든 자신의 허망한 삶을 발견하고 비로소 잃어버린 자연의 언어들을 기억해 낸다.
이제 마음의 눈을 뜨고 자연과의 언어를 쉽게 회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안해 보려고 한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후천적으로 길들여진 규칙적인 언어가 아닌 마음이 이끄는 대로 부르는 노래이다. 노래는 살아 움직일 것이다. 흥얼거림도 좋고 박자가 맞지 않아도 좋다. 내면의 소리를 내어 자연을 그냥 노래해 보자. 삶의 무거운 짐을 벗어 놓고 지금 당장 노래를 불러 보자. 현실에 주눅들고, 삶에 지쳐 버려진 황무지 같은 일상을 개간하고 빼빼 말라 시들어 가는 꿈의 원형을 찾아내자. 노래로 쟁기질을 하여 마음의 밭을 파헤치고 묵은 땅을 갈아엎어 소멸되어 가는 생명의 작은 씨앗을 찾아 뿌려 보자. 농부가 말라 죽은 것 같은 씨앗을 심어 노래하면 언젠가는 훌륭한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
이처럼 노래는 심폐소생술처럼 죽어 가는 마지막 호흡을 발버둥치며 연장시켜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을 확인시켜 주는 통로가 된다. 인디언들은 자신이 힘들고 아프면 자연으로 들어가 자신의 친구인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선다고 한다. 나무와 대화하고 노래하며 심신의 병을 치유하고 회복한다. 그들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산이 살아 있고 나무들 또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며 자신들도 살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을 노래로 표현한다.
성경 말씀에 예수님과 함께하여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의 특징을 기록한 구절이 소개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골3:16)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변화된 새 사람의 특징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노래의 결과는 완전한 치유이며 회복이다. 즉 묶인 것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찾았다는 것이다. 찬미하는 자는 영혼이 깃털 같이 가벼워 새가 하늘을 훨훨 날며 노래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은 노래 부르는 자를 더 가까이 두어 영광 받으시길 원하신다.
이제 서서히 리듬을 타보자. 어깨를 들썩이며 리듬에 맞춰 소리를 내어 보자. 우리가 노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현실이 무겁고 암담할수록 더 많이 노래하자. 절대 우리의 노래를 그 무엇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말자.
이처럼 노래는 심폐소생술처럼 죽어 가는 마지막 호흡을 발버둥치며 연장시켜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을 확인시켜 주는 통로가 된다. 인디언들은 자신이 힘들고 아프면 자연으로 들어가 자신의 친구인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선다고 한다. 나무와 대화하고 노래하며 심신의 병을 치유하고 회복한다. 그들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산이 살아 있고 나무들 또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며 자신들도 살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을 노래로 표현한다.
성경 말씀에 예수님과 함께하여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의 특징을 기록한 구절이 소개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골3:16)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변화된 새 사람의 특징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노래의 결과는 완전한 치유이며 회복이다. 즉 묶인 것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찾았다는 것이다. 찬미하는 자는 영혼이 깃털 같이 가벼워 새가 하늘을 훨훨 날며 노래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은 노래 부르는 자를 더 가까이 두어 영광 받으시길 원하신다.
이제 서서히 리듬을 타보자. 어깨를 들썩이며 리듬에 맞춰 소리를 내어 보자. 우리가 노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현실이 무겁고 암담할수록 더 많이 노래하자. 절대 우리의 노래를 그 무엇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