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광장-최유준 전남대 호남학과 교수] 위험사회의 백신
2021년 01월 25일(월) 08:00

최유준 전남대 호남학과 교수

2014년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한국이 총체적 ‘위험사회’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한 사건이었다. 한국인들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20년 전부터 서울 성수대교 붕괴와 바로 다음 해에 이어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지켜봐야 했다. 이후에도 대구 지하철 참사 등 수많은 희생자를 낸 대형 참사들을 목격해 왔다. ‘압축적 근대’로 일컬어지는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의 급속한 산업화는 높은 수준의 경제적 성과를 축적해 낸 반면 사회적 안전망의 총체적 부실화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돌아보면 최근 한국이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이른바 ‘K방역’으로 전 세계로부터 찬사를 들었다는 사실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이제 한국은 ‘위험사회’로부터 벗어난 것일까? 하지만, 울리히 벡(Ulrich Beck)이 말한 ‘위험사회’는 단순히 사고와 재난의 발생 가능성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다. 위험사회는 벡이 ‘2차 근대’ 혹은 ‘재귀적 근대화’로 일컫는 탈산업사회의 전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2차 근대는 산업화 단계의 ‘단순 근대’ 혹은 ‘1차 근대’의 제 요소들이 탈산업화 단계에 이르러 자기부정적이거나 자기비판적으로 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예컨대 ‘1차 근대’에서 ‘개인화’(individualization)는 전통적 혈연 공동체나 지연 공동체의 집단주의를 해체하고 근대적 의미의 ‘사회’를 형성하여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만연한 자기계발 논리(‘스펙 쌓기’와 무한 경쟁 체제)로 드러나듯 2차 근대로 진입하면서 개인화는 오히려 자기 강박과 구속의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2차 근대의 국면에서 사회는 더 이상 개인의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한 연대의 표상일 수만은 없다. 이렇듯 1차 근대의 초심으로부터 벗어난 2차 근대의 사회에 울리히 벡이 붙인 별칭이 바로 ‘위험사회’인 것이다.

여기서 ‘위험’이라는 용어는 한국에서 일상적 외래어로 쓰이는 ‘리스크’로 직접 옮길 때 그 뉘앙스가 더 잘 전달된다. 결국 ‘위험사회’란 근대적 자아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여러 선택들을 취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리스크’가 전면화되면서 그 ‘리스크 관리’의 임계점을 넘은 사회를 가리킨다. 한국은 적어도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받아들인 이래로 전 지구적 네트워크에 편입된 본격적인 ‘위험사회’가 되었다. 그 핵심적 면모는 위험의 가시적 측면으로서의 크고 작은 인명 사고들 자체보다는 오히려 그 이면에서 사회 전역에 퍼져 가는 (종종 왜곡된 집단주의와 결합된) 극단적 개인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의료보험 제도를 제외한 복지 제도 전반에서 서유럽에 비해 뒤떨어지는 한국에서 최근 맞닥뜨린 개인화 현상은 ‘사회 없는 개인’의 고립 상황을 더욱 심화하고 있다. 예컨대 1차 근대의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보육시설 확충이나 육아휴직 등의 사회복지 제도를 충분하게 마련해 놓지 않은 채로 육아 문제를 전통적 방식으로 가족들(특히 아이의 조부모)의 힘을 빌려 해결해 왔다. 하지만 개인화 현상이 가속화되는 2차 근대에서 이러한 전통적 방식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그 결과 한국은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낮은 출산율을 보이는 나라가 되었다.

‘K방역’의 외면적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적 위험사회는 더욱 가속화되고 전면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영끌’이라는 낯 뜨거운 용어로 수식되는 부동산 투자와 주식 투자 열풍은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자발적 리스크 부담 사회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지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예술과 문화는 위험사회의 수준을 알리는 또 다른 바로미터다. 한국의 예술가들이 처한 현실은 지금 어떤가? 코로나 이후 전업 예술가들과 예술 전문 인력들 다수는 현재 이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다. 문화예술 생태계의 위기는 특정 직업군의 위기가 아니라 한국적 위험사회의 또 다른 징후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울리히 벡은 “2차 근대가 ‘정치적인 것’을 재발견하도록 촉구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치적인 것’의 재발견은 문화예술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 ‘영끌’의 위험사회를 극복하는 정치적 힘, ‘개인만 있을 뿐 사회는 없다’라고 하는 극단적 개인화의 정신적 감염병에 맞서 심미적 공감의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백신이 문화와 예술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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