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에 대한 정조와 다산의 인권 존중
2021년 01월 19일(화) 08:00

김준혁 한신대학교 교수(한국사)

여러 차례 감옥살이를 경험한 다산 정약용은 감옥살이의 고통에 대해 ‘옥중오고’(獄中五苦)란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이는 ‘형틀의 고통’, ‘토색질 당하는 고통’, ‘질병의 고통’, ‘춥고 배고픈 고통’, ‘오래 갇혀 있는 고통’을 말한다. 조선시대 감옥에는 당연히 요즘 같은 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을 테니 그가 얼마나 힘들어 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이 첫 번째로 이야기한 ‘형틀의 고통’ 중 대표적인 것은 목에 칼을 채우는 것과 곤장을 맞기 위해 형틀에 올라가는 것이다. 감옥의 아전들은 사형수와 같은 중죄인이 아니면 채울 수 없는 칼을 작은 죄를 지은 죄수에게도 채웠다. 또 규정에도 없는 ‘못을 박은 곤장’을 쳐서 죄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했다. 그래서 죄수의 가족들은 형벌을 감경시키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아전들에게 뇌물을 주어야만 했다.

여기에 더해 질병의 고통이 감옥 안에서 함께 주어진다고 했다. 감옥의 불결함이 다양한 질병을 만들어 낸다. 감옥 바닥에 있는 볏단은 썩어 심한 악취가 났고, 간수들은 벼룩 등 해충들이 득실거려도 거의 치우지 않았다. 병든 죄수들에게 제대로 된 치료 또한 해주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조선 천주교의 전래를 기록한 달레(C.C. Dallet)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보면 책 앞부분에 조선 사회 전반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여러 기록 중 감옥에 간 천주교 신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감옥의 옥리(獄吏)들은 한 방에 천주교 신자들을 가득 몰아넣었다. 이들은 너무 빽빽하게 들어가 있어 다리를 뻗고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심문할 때는 고문을 함께 가했는데, 너무 심하게 매질을 하고 학대했다. 고문받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로 인해 생긴 피와 고름은 전혀 치료를 해주지 않아 살이 금세 썩곤 했다. 이로 인해 역한 냄새는 더욱 견딜 수 없게 되고, 심한 경우 페스트성 질병이 생겨 감옥에 있던 죄수 여럿이 목숨을 잃곤 했다. 여기에 더해 죄수들에게 굶주림과 갈증은 더욱더 무서운 고통이었다. 이처럼 감옥 안에 있는 죄수들에게 고문을 가하고, 상처 치료는커녕 전염병까지 생기게 하여 사람들을 죽이게 하였으니, 이 얼마나 심각한 인권 유린이란 말인가!

그래서 정조는 즉위 직후 형구(刑具) 규격을 세밀하게 규정한 ‘흠휼전칙’(欽恤典則)을 만들었다. 또 형조의 소관 사무를 정리한 ‘추관지’(秋官志)를 편찬하게 했다. 정조는 옥리들이 5일에 한 번씩 감옥 안을 점검하며 청소를 하게 했고, 죄인의 손과 발을 채우는 형구들을 항상 세척해 청결을 유지하게 했다. 그래야만 질병이 생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가난한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아픈 자에게는 약을 주어 감옥 안에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 없도록 했다.

다산 정약용은 ‘흠흠신서’(欽欽新書) 서문에서 “정조 시대에는 관찰사와 고을 수령들에게 명해 감옥에 있는 죄수들이 올바른 역할을 하도록 특별히 강조하고, 감옥 행정을 잘못한 수령들에 대한 징계를 해서 잘못된 일이 별로 없었는데, 정조가 죽고 난 순조 시대에는 감옥 행정을 너무나 잘못해 옥에 갇힌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개탄했다.

최근 코로나19 감염 예방에 대한 올바른 조치를 하지 못해 1000여 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온 서울 동부구치소의 모습을 보며 정조와 다산의 인권 존중과 교정 시설에 대한 인식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다산의 ‘흠흠신서’ 마지막 문장은 우리를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흠흠(欽欽)이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삼가고 삼가는(欽欽) 것은 본디 형벌을 다스리는 근본인 것이다.”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인권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은 죄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응당한 처분을 하면 된다. 하지만 그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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